영어로는 ‘그러니언’(grunion), 우리말로는 ‘색줄멸’로 불리는 물고기는 종족보전을 위해 자존심을 과감히 내던진다. 그러니언은 봄과 여름, 그것도 보름달이 고즈넉하게 떠 있을 때 뭍에 올라와 알을 낳는다. 만조가 거의 다 돼 썰물로 바뀌는 순간을 이용해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돌진해 축축한 백사장에 산란한 뒤 썰물을 타고 바다로 빠져나간다.
배와 옆구리가 은백색인 그러니언은 월광에 반짝거리면 장관을 연출하니 뽐낼 게 있는 물고기다. 그러나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가려는 몸부림은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일단 물이 없는 뭍에 올라왔으니 정상적인 자세로는 물로 들어가기 어렵다.
그래서 잔디밭 언덕에서 몸을 굴리며 장난치는 어린이처럼 모래사장의 미미한 경사를 이용해 몸을 굴려 바다로 들어간다. ‘물고기의 헤엄 수칙’을 위반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변에서 죽어야 하고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으니 멸종을 막을 수 없는 까닭이다. 종족 보전이란 ‘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린 것이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우리도 종종 ‘대의’와 ‘소아’의 기로에 서게 된다. 전자에 충실하면 존경받고 후자만을 좇으면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하기 일쑤다.
특히 영향력이 강한 공인의 경우 그 평가는 더욱 극명해진다. 앨라배마 주대법원장이 2001년 주 대법 청사 원형 홀에 5,300 파운드짜리 화강암 십계명비를 설치한 것에 대해 최근 연방법원이 정교분리의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며 철거명령을 내렸는데도 이에 불복해 사법파동을 야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주대법원장은 “나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신에 복종해야만 한다”것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법관이 복종해야 할 대상은 신이 아니라 법이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기본이다. 신에 대한 지고한 소명을 다하는 데 법복이 거추장스러우면 훌훌 벗어 던지고 목회자의 옷으로 갈아입으면 그만이다.
법관으로 남아 있으면서 개인적 종교적 신념에 법을 종속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주대법원장은 또 신성불가침의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거론했다. 그의 지지자들도 마찬가지 논리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만일 주대법원장이 회교나 불교로 개종해 코란이나 불경의 구절이 박힌 석판을 같은 장소에 설치했을 때도 표현과 종교의 자유라는 구호를 외치면 감싸려할지 의문이다. 그들은 아마 테러를 조장한다며, 신성모독이라며 코란 또는 불경 석판 철거캠페인을 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보다는 특정 종교에 대한 편애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세워졌지만, 헌법에 명시된 종교와 표현의 자유는 다양성을 억압해선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대법원장 지지자들은 헌법정신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신과 정부의 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며 주대법원장의 ‘신에 대한 복종’ 발언을 두둔했다. 교회와, 종교, 신은 분리할 수 없다.
종교와 신이 없는 교회는 나무와 돌로 지어진 한낱 건물에 불과하다. 그들 말 대로라면 헌법을 만든 선조들은 교회와 건물의 차이를 판별하지 못한 아둔한 사람들이다.
십계명의 내용이 어른은 물론 청소년에게도 귀감이 될만한데 왜 치우려하느냐고 볼멘소리도 들린다.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등등의 내용은 코란에도 있고 불경에도 있다. 십계명의 내용이 훌륭하다는 점으로 연방법원의 판결에 도전하려는 것은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본질을 흐리려는 것이다.
십계명비를 자신의 현관에 세우든 뒷마당에 놓든 안방에 안치하든 시비 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의 자유이며 표현의 자유다. 그러나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공공장소에, 더구나 법을 다루는 주대법 청사에 대문짝 만하게 설치돼 있는 모습은 십계명의 프리즘으로 법을 투시한다는 오해를 낳게 된다.
법은 무정부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타협의 산물’인데 반해 종교는 타협과는 거리가 멀다. 법과 종교는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 조화를 이룰 수는 있지만 뒤엉키면 사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정교분리를 강조한 헌법작성자들의 혜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십계명을 거대한 돌판에 새겨 전시한다고 해서 믿음이 강해진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금과옥조는 가슴에 새겨두고 실천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다.
주대법원장이 제 맘에 안 든다고 법을 무시한다면 과연 누가 법을 지키고 따르겠는가. 종교적 신념으로 포장된 주대법원장의 ‘소아’가 우리가 지켜야할 진정한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대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박 봉 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