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료는 개인·단체의 사유물 아니다

2003-08-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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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긍심이 배어 있는 대한인 국민회관이 ‘갱생’의 길로 들어섰다. 시작된 복원공사가 하자 없이 마무리돼야 하고 사후 관리도 주도면밀해야 한다. 처음에 의기충천했다가 ‘단맛’이 없어지면서 흐지부지된다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선조에게 낯을 들 수 없다.

‘도산 생일 오픈’보다 완벽한 공사가 우선
힘들어도 끝까지 자리 지킬 인사들이 적임
한국·주류사회의 지원 유도방안 강구해야


1368 Jefferson Blvd. Los Angeles. 나성한인장로교회 내 대한인국민회관에서는 아침부터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국민회관 내부는 썰렁했다. 큰방은 텅 비어 있었고, 몇 개의 작은 방에는 윤전기 등이 한켠으로 밀쳐진 채 덮여있었다.


지난달 29일 시작된 공사는 당초 예상했던 것처럼 만만할 것 같지 않다. 워낙 건물이 노후해 손볼 곳이 자꾸 나오기 때문이다. 1937년 지어졌으니 67년간 풍상에 버텨온 셈이다.

게다가 평소 꾸준히 관리를 했으면 몰라도 거의 무관심 속에서 세월을 보냈으니 성한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차를 사서 ‘고물’이 될 때까지 엔진 오일을 한 번도 갈아주지 않은 차와 별 차이가 없는 상태다.

큰방의 탁자에는 전기공사 도면이 좍 펴져 있고 도면에는 약 3,000 스퀘어 피트 넓이의 국민회관 각 방을 연결하는 전선의 위치와 작업 계획이 소상히 표시돼 있었다. 규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사를 진행해 나중에 문제가 터져 나오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게 관계자의 말이다.

도산 선생의 생일인 11월 9일을 개관 목표로 한 것은 국민회관 복원위원회의 사려 깊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밤샘 공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복원공사에 손톱만치의 미비한 점이라도 용인돼서는 안 된다.

목표일에 맞추느라 후딱 해치워 부실공사가 된다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물이 새고 전기가 끊어지고 환기가 잘 안돼 숨이 막히는 건물엔 국민회관이란 명패를 달아도 ‘민족 혼’이 편안하게 머물 수 없다.

아파트나 가정집, 또는 비즈니스용 건물이라면 하자 보수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국민회관은 다르다. 건물이 노후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우리의 정기가 서려있는 건물복원을 얼렁뚱땅한다면 ‘3류 민족’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뜻하지 않은 일로 공사가 지연되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꼼꼼히 고쳐야 한다.

설령 ‘11월 9일 오픈’이 무산됐다 해도 빈틈없는 공사 때문이었다면 도산 선생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하는 목숨 건 독립운동을 한 도산 선생이니 오히려 칭찬할 것이다. 오로지 국가와 민족만을 위해 생을 바친 도산 선생이 ‘9.11 오픈’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불호령을 내릴 리 만무하다.


국민회관 건물이 새롭게 단장되면 일단 ‘하드웨어’ 복원작업은 끝나지만 ‘소프트웨어’ 보전작업도 있다. 두 가지 작업은 사실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너무 긴 세월 방치돼 온 사료들이라 쉽게 손상될 수 있고 사료의 성격과 중요성에 따라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고 시간도 요구되므로 하드웨어 복원작업 중이라고 해서 한가롭게 ‘그늘’에서 쉬게 할 형편이 아니다.

거미줄과 수북히 쌓인 먼지를 털어 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아 사료를 검토하고 분류하는 일이 발빠르게 진행돼야 한다. 전문가의 도움을 공개적으로 구하는 적극적인 행보가 국민회관복원위원회가 지녀야 할 자세이다.

약 10년 전에 잠깐 국민회관 사료들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사료들이 많이 손상돼 관계자들과 방문객들이 끌탕을 했었다. 잘못 손을 대면 귀중한 사료가 부서질 정도였다. 책이나 편지, 지도 등 종이로 된 사료들은 좀이 슬고 누렇게 바랬었다.

독립운동 관련 서류, 독립의연금 기탁자 명단, 국민회관 도면, 신한민보 인쇄동판, 종이에 적은 애국가, 1940년대 태극기, 이민자 등록대장, 사진 등 수천 점이 이 순간에도 전문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세월이 더 흘렀으니 사료의 상태에 대한 설명은 굳이 반복할 필요도 없다. 지금이나마 복원작업에 돌입했으니 다행이지만 사료들을 제대로 보전하려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에 하나 이 사료를 자신이나 자신이 소속한 단체의 영향력을 키울 재산이나 담보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당장 마음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선조의 얼이 담겨 있는 ‘커뮤니티 보물’에 혹시 딴 마음을 품고 있다면 누구든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료 보전 작업이 신속하면서도 투명하게 진행돼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건물개수와 자료보존작업이 일단락 되면 3단계인 사후관리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남는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한국 독립기념관, 도산기념관이나 UCLA, USC 등에 관리를 의뢰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지만 안될 말이다. 힘들어도 우리가 해야 한다.

게다가 이민 100주년을 맞아 소중한 사료를 보관하고 있는 한인들이 커뮤니티에 헌납 의사를 비치고 있다. 이들 자료도 한 데 모아야 한다. 이민 선조들의 족적을 우리가 챙기지 못한다면 후손들에게 뭐라 변명할 것인가.

코앞의 이슈는 비용이다. 복원비만 해도 35만 달러에서 많게는 40만 달러로 예상된다. 한국의 보훈처와 도산기념사업회 지원으로 27만 달러가 확보된 상태이지만 나머지 재원은 명확하지 않다. 복원위는 이에 대한 계획을 조속히 밝혀야 할 것이다. 쉬쉬하면 궁금증이 의혹으로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 하려다 판단착오로 비난을 받는다면 억울한 일이다.

복원위가 이름 그대로 복원까지만 책임을 지기로 돼 있다고 하니 사후 관리를 논하는 게 ‘쓸 데 없는 걱정’은 아니다. 복원 작업이 종료되기 전에 사후 관리 청사진과 관리기구가 설치돼야 한다. 많은 돈을 들이고 힘들여 집을 지어놓고 관리를 하지 않으면 흉가로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한인사회가 중심에 서돼 한국과 주류사회의 지원을 유도하는 구체적인 안을 마련해야 한다. 독립운동사와 이민역사를 아우르고 있는 국민회관은 한국역사로 보나 미국역사로 보나 가치가 있다. 이를 잘 홍보하면 지속적인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후관리라도 ‘미션 임파서블’은 아니다.

사후 관리는 일은 수두룩하고 예산은 부족해 힘이 들어도 사명감을 갖고 봉사할 인사들이 적임이다. 이름, 얼굴 내는 게 목적인 사람은 곤란하다. 유관 단체들의 사심 없는 협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전투구로 복원작업이나 사후관리가 교착되면, 대의를 위해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른 도산 선생을 다시 한번 ‘투옥’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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