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살 뉴스

2003-08-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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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한국에 관한 뉴스에 자살이 헤드라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현대아산의 정몽헌회장처럼 부러울 것 없는 재벌이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려 투신 자살하였는가 하면 돈 때문에 절망에 빠진 엄마가 어린 자녀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는 종류의 안타까운 소식이 매일 보도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와 가까운 사람 중에 아무도 자살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축복된 삶을 살아왔다.

자살한 사람이 남기고 간 가족들의 슬픔을 직접 당하여 보지 못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자살을 하였다면 나는 분명 그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힐 것이고 동시에 그의 자살을 어떻게 미리 방지 할 수 없었을까하는 후회에 사로잡힐 것이다.

내가 가장 가까이 경험한 자살은 대학 다닐 때 일어난 일이다. 친구와 나는 나이든 남매로부터 거라지 방을 세내어 살았다. 주인 여자와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녀의 오빠와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주인여자의 오빠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가을 오후라고 기억된다.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는데, 학교에서 먼저 돌아온 친구가 집 앞에서 나를 맞이하며 “차고에 가서 좀 보아라. 늙은 남자가 자살한 것 같다” 라고 흥분하며 말하였다. 친구와 함께 나는 차고에 들어섰다. 남자가 차고 천장에 목을 맨 채 매어 달려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남자의 다리를 잡고 흔들었다.

그 순간 천장에 매달려 있던 그 남자의 몸 전체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그 남자가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흔들었기에 시체가 흔들렸던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 경찰이 왔을 때 우리는 차고를 향해 가리켰다. 경찰은 차고를 들여다보고 나서 우리들에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현관에 앉아서 장의사가 시체를 들것에 담아 옮기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주인 남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건강 문제로 절망 중에 자살을 하지 않았나 하고 짐작을 할뿐이 었다.

크리스천 전통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살을 금지한다. 이상한 것 같지만 자살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를 하였다 하자. 그는 사형 대상이 되었다. 자살한 사람에게 교회는 크리스천 장례식을 거부하였다.

가톨릭 백과사전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은 개인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 하셨다. 창조주인 하나님만이 인간의 목숨을 주관하신다. 하나님이 생명의 소유주이시며 인간에게 생명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책임을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창조자의 소유권과 주도권에 대해 반항하는 행위인 것이다”라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나는 9.11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참사사건의 장면을 독자들도 기억할 것이다. 불타는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붕괴되는 순간 십여명의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빌딩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에 넥타이가 펄럭이고 있던 그 사진을 기억 할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공포에 질린 가톨릭교회 신부가 손을 들어 기도하는 사진도 기억할 것이다.

그 신부는 뛰어내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 범하는 자살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9.11과 같은 상황에서 투신자살한 그 사람들의 행위나 신부의 행위 둘 다 이해가 된다.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죄이다. 왜냐하면 자기 살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타고 있는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행위만이 선택인 경우가 있다.
불안전한 세계에서 어떻게 완전한 선택만을 할 수 있겠는가?

크리스 포오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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