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과연 데이비스 리콜 될까

2003-08-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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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하락 불구 소환 속단 일러
지명도 큰 슈워제네거 단연 우세
누구든 가주 살릴 청사진 제시해야

가주 주지사 소환 선거가 전국적인 뉴스로 떠오르고 있다. 미 최대 주인 가주에서 주지사 소환 투표가 열리는 것은 거의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일뿐 아니라 액션 스타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뛰어 들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소환 선거의 필요성과 향후 전망 등을 짚어본다.

올해 3월 대럴 아이사 연방 하원의원(공)을 비롯한 보수파들에 의해 주지사 소환 투표 서명 운동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를 비롯 대다수 관계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911년 소환 투표 제도가 생긴 이래 실제로 주민 투표에 부쳐진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달랐다. 주민 투표 정족수 90만 표를 훨씬 넘는 130만의 가주민이 이에 서명했다.


가주 법은 소환 투표가 실시될 경우 주지사 출마 자격을 3,500달러의 등록비와 65명의 서명만 있으면 할 수 있게 해놨다. 이 덕에 이번 소환 투표에는 포르노 배우부터 전직 올림픽 조직위원장까지 247명에 달하는 온갖 군상들이 주지사가 돼 보겠다고 나서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중 70여명은 이미 무자격자 판정이 났고 나머지 가운데도 아직 40명은 심사가 끝나지 않아 정식 후보는 130~170명 선이 될 전망이다.

이 숱한 후보 중 지금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단연 액션 스타 아놀드 슈워제네거다. 그의 정치 경력이나 철학은 검증된 바 없지만 이번 선거처럼 유세 기간이 짧고 과반수가 아닌 단순 다수 표로 당선이 가능한 경우에는 지명도가 큰 후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거기다 그는 돈도 많고 공화당 내 상당한 지지 기반도 갖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과연 아놀드가 주지사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훌륭한 주지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놀드는 92년 대선에서 아버지 부시 지원 유세에 나선 적이 있고 부시 집안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 소환 투표에서 부시가 그를 공식 지지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초 백악관은 가주 주지사 소환 투표에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인기가 바닥인 데이비스가 주지사로 있는 것이 부시가 가주에서 승리하는데 유리하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소환 투표가 확정되고 슈워제네거가 우승 후보로 떠오른 이상 적극적으로 그를 밀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재 슈워제네거는 지지율 40%로 단연 1등이다. 그 뒤로 부스타만테 부지사, 빌 사이먼 전 주지사 후보, 칼럼니스트 겸 정치 행동가 아리아나 허핑턴, 피터 유버로스 전 LA 올림픽 조직위원장 등이 멀리 따라오고 있다. 데이비스를 비서실장으로 발탁해 키워준 제리 브라운 전 가주 지사마저 “이번 선거는 악수만 두지 않으면 슈워제네거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 도다.

리콜이 확정된 순간 데이비스 진영은 ▲민주당을 단합시켜 다른 후보를 내지 않고 ▲선거 일자를 가급적 늦추며 ▲후보자 명단에 데이비스도 넣는 작전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주 대법원이 선거 일자를 늦추는 것도 후보 명단에 데이비스를 넣는 것도 거부함으로써 깨졌다. 거기다 가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민주당원인 다이앤 파인스타인 연방 상원이 불참을 선언, 한숨을 돌리기도 전 부스타만테 부지사가 출마를 선언해 버렸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소환 선거에 불참하겠다던 그가 파인스타인이 나오지 않겠다고 발표한 지 하루만에 후보로 나오겠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그의 공식 입장은 “아직도 소환 투표를 반대하지만 만약의 경우 굳이 데이비스를 소환하겠으면 나를 찍어달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미 대다수 사람들은 “이제 데이비스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무개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라고 말할 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정치 생명이 끝났다던 인간들이 부활하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1960년 대선에서 지고 1962년 가주 지사 선거에서 떨어진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닉슨이 그랬고 1992년 대통령 3수에 실패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DJ가 그랬고 1994년 공화당에게 의회를 내준 클린턴이 그랬다.

데이비스는 주지사로서의 능력은 빵점이지만 캠페인에 관한 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달인이다. 1998년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낮은 후보의 하나로 꼽혔지만 자기보다 지명도 높은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주지사 직을 차지했다.


당선된 후 다음날부터 재선 자금을 모으기 시작, 7,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무기로 낮은 인기도를 누르고 2002년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데이비스는 적수로 리처드 리오단 전 LA 시장이 나오면 불리할 것 같으니까 공화당 예선에도 적극적으로 개입, 정치 풋내기 빌 사이먼이 지명되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로봇’이라는 별명처럼 그는 계획하지 않은 말이나 행동은 하는 법이 없어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다. 반면 상대방의 약점을 한번 발견하면 불독처럼 물고 늘어져 결코 놓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는 40년에 달하는 긴 정치 여정 중 선거에서 져 본 적이 거의 없는 승부사다.

초반의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 슈워제네거는 데이비스에 비하면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어떤 약점을 잡혀 개망신을 당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주지사를 하겠다고 나선 후보간에 난투극이 벌어져 주민들이 염증을 느낄 경우 ‘구관이 명관’이란 역풍이 불 가능성도 있다.

한인을 비롯한 이민자의 입장에서 슈워제네거가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도 생각해 볼 문제다. 그는 잘 알려진 바처럼 오스트리아 이민자 출신이다. 빈털터리로 미국에 와 인기 스타가 됐을 뿐 아니라 대표적 명문인 케네디 가와 결혼, 신분 상승에도 성공했다. 하이텍부터 식당 체인 등 온갖 비즈니스에 투자, 억만금을 쌓는 사업 수완도 보였다.

슈워제네거는 같은 할리웃 출신 공화당원으로 가주 주지사가 된 레이건과 자주 비교된다. 레이건은 배우 시절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다 그 때문에 첫 부인과 이혼했을 정도의 ‘확신 정치인’이다. 반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해서는 아동 복지 문제에 관심이 있고 낙태나 동성애 문제 등에 리버럴하다는 정도 외에는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그는 불법체류자에게 사회 복지 혜택을 박탈하는 프로포지션 187을 지지했다고 하는 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가 주지사가 되는 것은 라티노 등 다른 이민자 사회와 연대해 적극 막아야 할 일이다.

데이비스의 인기가 바닥을 기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38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예산 적자 때문이다. 누가 주지사가 되든 이 문제는 세금을 올리던가 예산을 깎던가 양단 간 조치가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풀 건가에 대해서도 그는 말이 없다.

이민 1세가 가주 주지사가 된다는 점으로 보면 슈워제네거의 출마는 환영할 일이다. 또 배우라고 정치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지만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나라로 쳐도 세계 5위인 가주 행정 책임자로 뽑는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 슈워제네거가 진정으로 주지사 노릇을 할 생각이 있다면 가주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갈 청사진을 제시하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옳다고 본다.

민 경 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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