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총영사의 소신

2003-07-2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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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총영사 가운데 한 분은 임기 내내 ‘소신파’로 불렸다. 불편부당이나 정의를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태양을 향한 해바라기의 모습이었던 까닭이다. 이 총영사는 한인사회 단체활동 지원이나 커뮤니티 대소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이 대신 적당히 맡아 처리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총영사마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커뮤니티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한 총영사와는 대조를 이뤘다. 본국 정치인들도 웬만해서는 이 총영사를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는 후문이니 굳이 한인사회만 우습게 본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대단치 않은 국회의원은 ‘짭짤한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총영사가 ‘꾸벅 죽는 대상’이 있었다. 바로 당시 한국사회를 쥐고 흔들던 TK출신 정치인이 그들이다. TK출신 의원이 LA에 당도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공항에 나가 예의를 갖추었다. LA에 특별한 공무가 있어서 온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저 바람이나 쏘일 겸 경유해서 떠나는 사람들에게도 소홀함이 없었다.


이 총영사는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 좌우명은 “힘있는 자에게는 최선을 다 한다”로 압축된다. 그 소신으로 ‘하해와 같은 은덕’을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한인사회 한복판’에 나와 있는 총영사에게 어울리는 소신은 아니다.

또 다른 총영사는 한인사회와 함께 하며 한인의 권익을 대변하겠다는 소신을 하나 하나 지켜 나갔다. 사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한인들과 어울리려 했다. 외교관이라기보다는 민간사절단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 정도였다.

행사지원과 관련해 “돈 좀 달라”고 영사관에 지나치게 칭얼대는 사람들에게는 더도 덜도 없이 냉정해 “차갑다”는 비아냥거림도 들었지만 진정으로 총영사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대타’를 지양하고 본인이 직접 뛰었다. ‘관’에 대한 평점이 짠 게 통례이지만 이 총영사는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고 이임했다. 부족한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재임기간 중 한인들과 더불어 지내겠다는 소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였다.

새 총영사가 부임한 지 한달 남짓이라 어떠한 단정적인 판단도 성급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일련의 사안에 대한 총영사의 태도가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한인사회와 유리되어 가고 있다는 조짐은 간과할 수 없다.

며칠 전 ‘한국전쟁 휴전 50주년 기념식’을 마련하고 총영사의 격려사를 고대하던 한인들은 교민담당 영사의 대독에 만족해야 했다. 당일 행사가 8개나 돼 도저히 총영사가 참석할 수 없다는 게 영사관 측의 해명이지만, 총영사가 다른 어떤 행사에 참석했으며 경중을 어떤 근거로 가려졌는지 시원한 답변이 없어 ‘오해’를 키우고 있다.

한국은 물론 미국의 주류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고 보도를 한 ‘정전 50주년’인데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불참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총영사가 한인사회의 특정 행사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다만 총영사의 일부 부하직원들이 타운을 좀 더 안다는 이유로 총영사의 귀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될 뿐이다.

지난달의 ‘6.25 기념식’에 이어 이번 ‘휴전 50주년 기념식’에까지 불참한 것은 이 행사를 개최한 재향군인회 미서부지회가 보수성향의 단체라서 그런 것이란 의구심을 낳을 수 있다. 만에 하나 부하직원들이 “보수 우익단체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조언했다면 조언자도 문제이지만, 총영사가 이 말에 솔깃해 했다면 이도 문제이다.


총영사와 영사관이 한인사회를 정치적 집단으로 여기고 정치적 편견으로 재단하려 든다면 크나큰 우를 범하는 것이다. 공무원 신분으로서 청와대와의 ‘코드 맞추기’나 집권여당과의 교감이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치우친 시각’을 한인사회에 적용해선 안 된다.

한인사회에도 보수파가 있고 진보파가 있다. 그러나 총영사나 영사관이 이를 조화롭게 조율해 발전적인 다양성으로 승화시키는데 일조하지는 못할 망정 양측의 간극을 부각시킨 듯한 인상을 준다면 한 참 잘못한 일이다. 행사불참 자체를 놓고 따지는 게 아니다. 그 결정 과정을 지배한 ‘참여정부’의 ‘비 참여적 사고’를 집으려는 것이다. 이곳에서 지낸 시간보다 지낼 시간이 월등히 많은 총영사이기 때문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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