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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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달팽이 선언’

2003-07-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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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는 대체로 환한 빛을 반긴다. 그러나 빛을 싫어하는 존재도 여럿 있다. 달팽이는 축축하고 어두운 곳을 좇는다. 도피사범도 가급적 남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햇빛보다는 달빛을 선호한다.

달팽이는 해가 저물고 달이 뜨면 풀 잎 사이로 몸을 헤집고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빗방울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으로 소풍을 나선다. 도피사범도 대낮을 피해 다니다 땅거미가 지면 기지개를 켠다. 도피사범이 두려워하는 빛은 ‘사람의 눈’이다.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까 봐서다.

‘달팽이 걸음’이란 표현이 있듯이 달팽이는 느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심스럽다. 그러나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세상을 조바심으로 매만져도 그 족적은 숨길 수 없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띄엄띄엄 물 자국이 남기 때문이다. 몸에서 배어 나온 수분이 시멘트 바닥에 고스란히 자리를 잡는다.


도피사범도 행동거지에 신경을 쓰고 신변안전을 위해 주변에 있는 촉각, 없는 촉각을 모조리 동원한다. 색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눌러 쓰고 다니더라도 로봇이 아닌 이상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항상 ‘경계 안테나’를 풀가동 하기는 어렵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희미하나마 노출이 되기 마련이다.

흔적을 남긴 ‘죄’로 달팽이는 금방 사람의 눈에 들어온다. 짓궂은 어린이가 신기해하며 몸에 살짝 손가락을 대면 이는 곧 비상사태로 해석되고 달팽이는 몸에 지고 다니는 ‘딱딱한 집’ 속으로 쏙 들어간다. 한동안 집에서 미동도 않고 숨을 죽인다. 경계가 풀리고 다시 몸을 비틀어 밖으로 나오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집으로 재차 대피한다.

도피사범도 ‘이상한 조짐’에 무척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미국에 왔던 한 도피사범은 커피샵에서 누군가 접근해 “혹시 아무개 아니냐”고 묻자 예수를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처럼 “사람을 잘못 봤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다시는 그 커피샵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달팽이는 누군가 자기 몸에 손을 대거나 귀찮게 했을 때 “왜 그러냐”고 대들지 않고 마냥 ‘잠재적 위협’에 몸을 사린다. 약자의 본능이고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그래서 일종의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달팽이는 측은함을 불러일으킨다. 도피사범도 기세 등등한 모습과는 매치가 되지 않는다. 도피자라는 의식이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자신이 저지른 범법 행위와 전혀 무관한 일로 인해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당해도 “공연히 대들다 잘못되면...” 하는 마음에 수그러들고 만다. 사는 게 정말 사는 게 아니다. 도피사범이 법을 위반한 것은 용서할 수 없지만 괴로움과 수모의 연속인 도피생활엔 가녀린 동정심마저 발동한다.

비참한 ‘달팽이 생활’을 하는 도피사범이 미국에만 3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기, 횡령, 배임 등의 죄를 저지르고 은신처로 미국을 택한 사람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는 미국이 ‘도피자의 천국’이란 오명을 벗기는커녕 굳히기에 들어갔다는 느낌을 준다. 한미 양국간 범인인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도피자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됐었으나 도피사범의 소재파악이 어려워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도피자의 의지가 법과 행정규제를 비웃고 있다.

그렇다고 손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권력이 수반되지 않는 계몽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공자님 말씀’에 불과하다. 그러니 영사관은 미국 사법당국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해 도피사범의 소재파악에 정력을 쏟아야 한다. 또한 도피사범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는 한인이 있다면 “계속 이래야 하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그러나 사안의 종지부는 도피사범 본인이 찍어야 한다. 죄 값은 달게 받고 새 생활을 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미국과 한인사회 이미지에 먹칠하고 있다는 이유는 둘째이다. 본인과 그 가족이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게 첫째 이유이다. 세월이 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도피사범’이란 자국은 강산이 변해도 남는다. 명성을 떨치지는 못하더라도 오명을 남겨서야 되겠는가.

“나는 더 이상 달팽이 신세가 아니다” 하며 ‘탈 달팽이 선언’을 할 용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제 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박 봉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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