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요즘 한국 정치판은 한마디로 ‘X판’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게 뭔가.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인들에게선 그런 인간적 우월을 찾을 수가 없다. 새빨간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검은 돈을 삼키고도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이라며 떳떳한 표정이다. 가끔 일본 정객들 중엔 불법행위가 문제되면 수치심에 겨워 자살의 길을 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헌정사 반세기,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에겐 수치심이니 용퇴니 자살이니 하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패배주의에 불과하다. 저 난장판을 보면서 옛 경구(4자성어)가 새삼 떠오르는 것은 필자만의 상념은 아닐 것이다.
먼저 점입가경. 볼수록, 갈수록 볼만하다는 뜻이다. 한국 정치판의 스타격인 노무현 정권과 그 정권을 탄생시킨 민주당의 공동 공연은 ‘굿모닝 시티’라는 공연물 타이틀과는 생판 다르게 난장과 난타로 엮어지고 있다. 이 드라마의 제1막 주연은 ‘사기꾼’이 분명한 한 건설업자와 그로부터 검은 돈을 꿀꺽한 정대철이라는 가문 좋은 집안의 전도유망한 집권당 대표다. 2막 3막 그리고 피날레까지 간다면 다른 주연급 얼굴도 드러날까. 하지만 쇠고랑 찬 이는 돈 준 사람 뿐, 돈 받은 당사자들은 건재하다. 그 와중에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이가 정 대표를 향해 “나 같으면 정계를 떠나겠다”고 한방 날렸다. 궁지에 몰린 듯하던 당사자 입에선 놀랄만한 대사가 터져 나왔다. “받은 돈은 노무현 대통령 선거자금으로 들어갔다!” 점입가경의 예고편이다.
검은 돈 챙기고도 당당한 얼굴들
다음은 필유곡절. 싸움판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데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다는 뜻이다. 정씨와 청와대측 인사, 민주당 돈 관리하는 이상수라는 사람(사무총장)의 말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아마 내일 또 다른 말이 나올 것이다. 선거 때 기업들로부터 거둔 돈은 50억이라느니, 아니 100억 정도는 됐을 거라느니, 선거 때 노무현 지지자들이 낸 ‘돼지 저금통 돈’은 40 몇억이 아니라 70 몇억이라느니--하여튼 선거자금 내용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고 있는 것이다.
휴! 한두 푼도 아닌 그 많은 돈을, 하지만 그럴밖에 없는 곡절이 있을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보고한 대선 자금, 사무총장 설명, 당 백서를 통해 공표한 돈 내역, ‘굿모닝시티’가 제공한 검은 돈의 행방,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인 데다가 이걸 줄이면 저게 불어나고 저걸 줄이면 이 게 또 불어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인 모양이다.
관객(국민)이 감탄(사실 분노라 해야 하지만)하는 것은 그럼에도 저들 표정이 하나 같이 당당하다는 점이다. 사람이라면 그저 부끄럽고 죄스러워 땅속에라도 숨고 싶을 터인데 모두 당당하다. 후안무치다. 얼굴 두꺼워 수치를 모르는 자들 같다. 얼마를 받아 당(대선자금)에 내놓았고, 얼마는 그냥 받았다며 왜 나만 희생양이 돼야 하느냐, 가만히 앉아서 죽을 줄 아느냐, 해볼 테면 해보라고 팔을 걷어붙인 당대표, 같은 업자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시중에 소문이 파다하자 “단 한푼 받은 게 없는 나를 건드렸다가는 언론이든 정치인이든 각오하라”고 분기탱천한 또 다른 정권 실세, 돈 액수를 놓고 아침저녁 말 바꾸기에 여념 없는 당 사무총장--모두 당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돼지 저금통’의 비밀은?
부끄러워야할 사람은 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가 ‘사람팔자 알 수 없다’는 속언대로 청와대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돼지저금통’이다. 당시 노 후보가 연설하는 연단은 깜짝 해프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지자들이 한 푼 두 푼 채워 넣은 플래스틱 돼지저금통을 연단 앞으로 던지는 이색 행사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노 후보는 감격스런 어조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전화할 재벌도 없습니다.--여러분들이 1만원씩만 돼지저금통에 넣어 도와주신다면 그걸로 선거를 치르겠습니다!” 아마도 신용카드를 마구 긁어 나중에 ‘신용불량자’가 된 젊은이들 중엔 지갑에 달랑 한 장뿐인 만원 지폐를 정성껏 접어 알록달록한 돼지저금통에 넣은 다음 연단을 향해 힘차게 던지면서 ‘노무현’을 연호했을 것이다. 국민들도 감격했다. “노무현은 그래도 깨끗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노 후보 진영은 재벌로부터도 큰돈을 걷었고, 심지어 검은 돈도 비집고 들어왔다는 것이 아닌가. 또 속은 셈이다.
동병상련, 이건 야당 쪽에 걸 맞는 말이다. 이번 사건은 집권세력의 도덕성에 피니시블로를 먹일 호재가 분명하다. 하지만 성명 한두 건 내놓고 관망 중이다. 같은 당 한두 명도 업자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또 대선 자금에 관한 한 야당도 찔리는 데가 없지 않을 터. “당시 집권당 후보하고 야당 쪽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는 그 쪽 말에 일리는 있다. 대선 전후 후원회 모금액수만 보아도 10배로 민주당이 싹쓸이했으니 알만하다. 하지만 먼지를 털면 야당도 괴롭기는 하다.
끝으로 무슨 말이 딱 맞아떨어질까. 용두사미다. 용머리에 뱀 꼬리, 지금 난리법석이지만 그 결과는 뻔할 거라는 얘기다. 아마도 정대철씨는 한두 번 검찰에 나가 ‘정치자금은 무죄’임을 주장하고, 그 기세에 검찰도 어쩔 수 없이 ‘불구속 기소‘에 머물고, 그리하여 금배지를 굳건히 가슴에 단 채 ‘신당’ 창당의 막후 조정자로서 바쁜 나날을 보낼 지도 모르겠다. 노 대통령의 해명이 있겠지만, ‘역시 달변이군’ 하는 느낌만 남지 않을까.
안영모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