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주 자이언 캐년과 브라이스 캐년의 등산길은 심심하지 않다. 가끔씩 출현하는 다람쥐가 생전 처음 보는 등산객을 오랜 친구인양 반갑게 맞기 때문이다. 앞 두발을 들고 나 보란 듯 앙증맞은 자세를 취해도 발길을 재촉하면 “왜 그냥 가느냐”는 듯 졸졸 따라 온다. 등산객들이 해를 끼치지 않아서인지 겁 없는 아이처럼 당돌하다. 가끔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등산객들이 다람쥐에게는 ‘반가운 손님’이다.
“다람쥐 등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다 적발되면 벌금을 부과한다”는 안내문대로 이들이 ‘공짜’에 길들여져 자생력이 떨어지면 결국 생태계에 나쁘다고 하지만, 혼자서 집을 지키다 여행에서 돌아 온 주인에 안기는 충견처럼 사람만 보면 애교부리는 다람쥐를 매정하게 대하기는 쉽지 않다. 산 다람쥐에게 등산객은 ‘더불어 지낼만한 존재’였다.
도심에서 사람과 다람쥐의 관계는 확 달라진다. 길을 건너려는 듯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다람쥐는 자동차가 지나가면 쏜살같이 줄행랑을 친다. 우물쭈물하다 ‘태산’만한 바퀴에 압사한 가족과 친구들의 비극을 익히 알고 있으니 질주하는 자동차와 운전자에 대한 다람쥐의 민감한 반응은 당연하다.
한적한 주택가 좁은 길을 걷는 보행자에게도 다람쥐는 그리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다람쥐를 해치거나 놀라게 할 의도가 손톱만큼도 없는 보행자라도 다람쥐를 어루만지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을 보는 순간 나무 뒤에 숨거나 아예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린다. 동네 다람쥐에게 인간은 아무리 상냥한 표정을 짓고 조심스레 접근하더라도 ‘경계 대상’이다.
이국 땅에 정착한 우리에겐 낯설지만 친구처럼 반겨주는 산 다람쥐가 아쉽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주류사회에는 소수계 이민자에 대한 경계와 냉소가 깔려 있다. 동네 다람쥐와 같이 노골적으로 우리를 경계대상으로 여기고 접근을 피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탐탁지 않게 여기는 속마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드러난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주류사회가 소수계에게 보내는 눈길이 예전 같지 않아 우리도 요즘은 ‘바짝 엎드린 상태’에 있다. 웬만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젊은 한인이 파열음을 냈다. 버지니아에 사는 27세 한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해 ‘아부 우바이다’란 이름으로 이슬람 급진 테러단체의 성전에 참여하고 훈련을 공모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 파장을 우려해 술렁이는 지역 한인사회 뿐 아니라 미주한인 모두의 걱정거리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전개하면서도 시민권자에겐 비교적 관대한 미국이다. 영주권자를 포함한 비시민권자들와 달리 시민권자는 ‘내 편’이란 시각이 강했다. 헌데 테러 연루혐의의 한인이 시민권자로 밝혀졌으니 당분간 한인 시민권자들이 ‘경계 대상’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게다가 이 한인은 한국에서 출생한 시민권자이므로 귀화시민에 대한 편견도 움틀 수 있다.
아울러 주류사회에서 생활하는 한인들이 직장 내에서 불편한 시선을 받을 지 모를 일이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남북한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미국인들로부터 ‘억울한 눈총’을 받았다는 한인들의 경험이 반복될 수 있다. 가뜩이나 북한 핵 문제로 염증을 느끼고 있는 미국인들이 이번 일로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단순논리를 편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시기적으로도 거의 무한대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긴 싸움이다. 또한 ‘이라크 전쟁’과 달리 세계가 동참하는 이론도 반론도 없는 사안이다. 온 국민이 공감하고 대응 범위도 사회 전반을 망라한다. 그러니 이 전쟁의 표적에 한인이 들어 있다는 혐의 자체만으로도 섬뜩하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주류사회에서 한인을 경계 대상으로 삼는다면 커뮤니티에도 지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미 사건은 터졌지만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가벼이 다룰 일은 아니다. 혐의 내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반 테러 성명’을 발표하거나 ‘서명운동’을 전개해 ‘한인=경계 대상’이란 인식이 확산되지 않도록 손을 써야 할 것이다. 한인들이 산 다람쥐가 반기는 등산객이 아니라, 동네 다람쥐가 경계하는 보행자로 각인 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