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의 짧은 글 긴 여운
2003-03-25 (화) 12:00:00
졸업식장에서
승훈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날입니다. 단층뿐인 강당 좌석 대부분은 졸업생들에게 돌아갔고, 학부형들은 뒤쪽에 콩나물시루처럼 부대끼며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식은 정시에서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졸업생들이 제 시간에 오지 않아 예행연습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학부형들 앞에서 계속된 예행연습 도중 졸업생들의 호응이 못 미치자, 지도교사의 입에서는 몇 번이나 아슬아슬한 내용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각 반에서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수가 불과 두세 명에 지나지 않음을 감안하면, 모든 졸업생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졸업식에 임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아예 무리였습니다.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졸업생들의 웅성거리는 잡담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졸업식장이라기보다는 시장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식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러분을 또다시 떠나보내자니 마음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습니다(교장선생님 훈화).
-동창회는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입니다. 아무 걱정 말고 교문을 나서십시오(동창회장 격려사).
-이제 내일이면 형님들이 없겠거니 생각하니 왠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재학생 송사).
-존경하는 선생님, 사랑하는 후배, 정든 교정을 영영 떠나야 한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습니다(졸업생 답사).
그 누구도 듣지도 믿지도 않는, 진실이 비어 있는 말 그리고 말…….
그 공허한 말들만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그 졸업식장이 교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빈말들만 난무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 말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삶이 뒤좇지 않으면 천사의 말을 해도 그것은 단순한 공기의 떨림―그것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에 지나지 않습니다.
-2003년 3월 ‘쿰회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