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음은 젊은데…

2002-11-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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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아침 6시가 되면 열 두어 명의 남자들끼리 모이는 조찬 기도모임이 있다. 대부분의 회원은 70대와 80대의 나이든 분들이다. 그들은 몸은 비록 쇠약하여지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젊고 예리하다. 황혼 길을 함께 가는 길동무로서 서로의 삶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이 모임에서 나는 가장 나이 어린 회원이다. 나보다 몇 발자국 앞서 가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도 곧 다가 오고 있는 황혼의 모퉁이를 힐끗 쳐다 볼 수 있는 기회이기에 이 모임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다.
회원 중에 82세 되는 짐이라는 남자가 있다. 지난주 모임에서 짐은 자기도 이젠 늙어나 보다라고 한숨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얼마 전에 있었던 폭풍이 굴뚝을 망가뜨렸다. 나는 피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아내에게 지붕에 올라가겠다고 말했더니, 아내는 ‘안 된다. 큰일 날 일이다’며 말렸다. 아내가 반대할수록 나는 더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내가 외출한 사이에 사다리를 벽에 기대어 놓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피해 현장을 살핀 후 지붕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그때 문제가 생겼다. 80 먹은 팔 다리가 말을 안 들어주었다. 젖은 지붕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지붕에 배를 깔고 온몸을 움직이며 사다리까지 오기는 하였는데, 사다리를 내려오는 일 문제였다. 어떻게 내려올까 하며 지붕 위에서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사다리에 등을 기대고 배가 하늘을 향하는 포즈를 취하며 간신히 내려왔다. 지붕에 올라가는 일도 이젠 없을 것 같다” 하며 웃었다.
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시조들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젊음을 안타까워하며 애절하게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동경하는 시조가 많다. 한국 시조를 읽으면 한국인의 정서인 ‘한’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겨울에는 여름을 그리워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가을에는 나뭇잎이 파랗게 달린 여름을 동경하고 시인이 혼자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었으면 하고 그리워한다. 그리움과 회한을 담은 시조들이 많다.
나이 드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젊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무명 시인의 시조 한편이 생각난다. 글의 내용이 대강 이렇다. “마음아. 너의 젊음의 비결이 무엇이냐/몸은 비록 늙었지만/ 마음만은 아직 젊구나/만약 내 마음처럼 행동을 한다면/사람들이 조소할까 두렵구나.” 이 시조는 짐을 묘사하기에 딱 맞는 내용이고, 또한 나 자신을 묘사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 우리 집 하수구가 막혔다. 매년 한두 번씩 연례 행사하듯이 하수구 전문가를 불러다가 막힌 것을 뚫었는데 올해는 큰마음 먹고 오래된 파이프를 갈아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어느 아침에 괭이를 들고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시멘트처럼 굳은 땅은 좀처럼 파지지가 않았다. “이 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다” 하고 결국 파는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아는 25살 난 실직한 청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전화를 반가와 하며 그는 몇 시간 동안 힘을 써 땅을 파주었다. 그 청년이 힘든 육체적인 노동을 하였고, 나는 파이프를 갈아 끼우며 물이 새지 않게 하는 작업을 즐겼다.
짐이 나이가 들어 다시는 지붕에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인정하였을 때 또 내가 힘이 딸려 도랑을 파지 못하겠다고 인정하며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는 방법을 선택하였을 때 우리들은 잃은 것이 있다.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시조작가들처럼 마음은 아직도 젊은 청년 같지만 괭이를 들어 땅을 파려하였을 때 몸이 늙어 가는 사인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80이 되었을 때 짐처럼 지붕에 올라가는 그런 어리석음, 아니, 그런 담력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때에 나의 마음마저 80살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미국인 어느 노 작가의 글 중에 “꿈속에서 나는 결코 80이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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