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선 감상법

2002-11-1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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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칼럼 난에서 한국 대통령선거에 관해 글을 쓰기는 이번으로 세 번째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대선 감상법’이라는 제목 아래 첫 글이 나갔다.
당시는 민주당 대선 후보가 누가 될지 오리무중인 때였다. 다만 이인제가 선두를 달리던 때라, DJ가 밀기만 하면 당내 경선 승리는 무난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성공을 반반으로 점쳤다. 이인제의 정치적 변신과 당돌한 성품이 DJ를 안심시키지 못하리라는 나름대로의 분석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무현이라는, DJ에게는 의리와 충성에 관한 한 안심 만점인 무명의 인물이 ‘노풍’이라는 바람을 몰고 불현듯 등장 했다.
이 경상도 사나이의 느닷없는 등장을 족집게처럼 집어내지 못한 게 나의 첫 번째 오류라면 오류다. 하나 난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그 무모한 예측을 던졌겠는가. 글 말미에 단서를 다는 걸 잊지 않은 터다. “이런 저런 가능성들은 엄밀히 말해 점쟁이 점만큼이나 불확실성을 갖는다. 워낙 이 나라 정치인들이란 막판에 얼굴과 말을 뒤집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불과 한달 반전, 대선판이 이회창-노무현-정몽준 세 사람으로 좁혀진 직후에도 나는 같은 제목으로 두 번째 예측을 감행했다. 논조의 초점은 대개 3갈래였다. DJ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대선판을 조종하고 있음을 시사하면서 관전의 첫 포인트를 “이회창이 집권하면 우리는 다 죽는다”는 DJ측과 민주당 사람들의 급박한 심리에 조준했다.
다음 두 번째 주목해야 할 키워드를 나는 “호남의 민심 동향”에서 찾았다. 이인제를 눕히고 노무현을 급부상시킨 것이나, 뉴 페이스로 등장한 무소속의 정몽준 인기도가 호남 현지에서 노무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나, 모두 상식을 넘어선 이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적인 관전 포인트로 노무현-정몽준의 ‘극적인 단일화’를 예측했다. 현재까지 이 예측들이 크게 빗나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지난 주말, 노-정 두 사람은 내가 예상한 만큼 극적이진 않았지만 단일화라는 대원칙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나의 예측을 충족시켰다. 노-정 두 사람이 이 정치 쇼의 공동 주역이라면 무대감독도 있을 법한데 과연 그게 누굴까. 얼굴을 감춘 채 쇼 무대를 조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은 매우 용의주도한 각본을 준비한 뒤 대사와 연기를 지휘(콘닥트) 하고 있다는 게 나의 상상이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대거 탈당을 선언하고, 당 대표위원이라는 한화갑-바로 DJ의 가신이라는 이가 노무현의 바지가랑이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이내 지레 짐작을 할지 모르겠다. “정몽준이로 결론이 났구먼-” 그러나 그건 좀 성급한 결론이다. 모습을 감춘 무대 감독의 머리는 명석한 편이다. 여론으로만 보면 정몽준이 노무현을 앞선 게 틀림없다. 하지만 덜컥 정몽준을 ‘솔로 히어로’로 밀기는 위험하다. 그의 인기도가 가변적이며 취약점을 갖고 있다는 게 무대감독의 걱정이다. 대북 지원을 둘러싸고 야기된 현대그룹의 탈법이 하나 둘 드러나면서 자칫 정몽준을 파멸로 몰지도 모를 뇌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과 남은 한달 동안 무대 감독의 쇼 엔터테인먼트는 아마도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멋진 페어플레이를 통해 노-정 두 사람의 얼굴을 민주적이고 신사적인 미남인기 배우로 함께 분장시키고, 마치 “금주의 인기 차트 1번은 누구” 하는 식으로 인기순서가 정해지면, ‘솔로 히어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탄생할 수 있다. 여기에 패자가 승자의 손을 기꺼이 들어주는 감동의 장면을 연출한다면 쇼 흥행은 대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제 노-정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단일 후보가 될 것이냐에 있지 않다. 앞으로 5년간 이 나라를 통치해 나갈 집권자가 이회창인가 아니면 반 이회창 진영의 인사인가라는, 큰 무대에 등장할 ‘진짜 히어로’에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예측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우선 현행 선거법 때문이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선 언론이 특정 후보의 당선을 예측하거나 지지를 표명했다가는 쇠고랑을 찬다.
곁들여 한 가지 더 고백할 일이 있다. 한 달 전의 두 번째 글에서 나는 JP(김종필)가 모종 합종연횡을 노리며 침묵으로써 몸값을 올리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이런 말로 글을 맺었다.
“그(JP)가 붙는 쪽에 승리의 여신이 또 다시 미소짓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 정치의 희극이요 비극이다.” 나의 조건부 예측은 그러나 ‘절반의 성공’만 거둘 것 같다. 다시 말해 절반은 틀릴 공산이 커졌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민련조차 추스르지 못한 딱한 처지인만큼 누군가와 손을 잡을 게 틀림없지만 JP의 역할은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가 붙는 쪽에 행운의 여신이 과연 미소를 짓고 있을까? 내 개인의 빗나간 예측이 나라를 위해 다행한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돌팔이 예측자’의 오명을 흔쾌하게 받아들이겠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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