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녀의 미소와 핵무기

2002-10-22 (화)
크게 작게
나는 북한을 욕할 생각이 전혀 없다. 지금 이 시각, 자신의 생존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최선을 다 하고 있는 북한 지도층과 인민들을 왜 욕한단 말인가. 살아 남으려는 그들의 몸부림에 오히려 경외의 마음이 들 지경이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에 대해 관계 당국은 국가보안법의 ‘북 찬양 고무죄’에 해당된다고 겁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은 뒤 죄를 물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요즈음 워싱턴은 북한이 ‘새로운’ 핵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해 왔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지난 94년, “핵 개발을 중지 할 터이니 그 대신 경수로 발전 시설을 해 달라”는 북한 요구를 받아들여 막대한 달러를 지원한 미국으로서는 낭패를 맛본 셈이다. 한데 이번 사태는 과거 북한의 상투적 행태와 여러 모에서 다르다는 점도 주목된다. 과거에는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고 “핵처리 시설을 건설했지?”하고 윽박질러도 “그런 일없다”고 잡아떼던 북한이 이번에는 증거를 내밀자 “그래 했다, 어쩔래?” 하고 당당하게 나왔으니 말이다.
북한이 스스로 자백을 한데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공갈외교용이라느니, 양키들이 알아버린 이상 깨끗이 자백하고 저들과 관계개선이나 서둘자는 현실 외교라느니, 핵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생존을 담보 받으려는 속셈이라느니 하는 해석들이다. 나는 여기서 북한이 왜 자백의 길을 선택했는가를 따지고 싶지 않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국가 생존과 인민의 내부 단합을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때로는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에 주목할 뿐이다.
나는 또 개인적으로 북한을 이끌고 있는 김정일이 대단한 전략가요, 장사꾼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는 권력을 대물림 받은 온실 속의 독재자가 아니다. 지략과 담대함과 리더십에서 아버지 김일성을 능가한다고 여겨진다.
이는 공연한 소리가 아니다. 남쪽의 지도자와 국민들을 요리하는 그 능수 능란한 솜씨를 들여다보면 이내 알만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하기로 정평 난 김대중 대통령(DJ)을 다루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김정일은 DJ가 노심초사 이루고자하는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남북 정상회담의 과실을 선뜻 내주고 그 연장선에서 노벨 평화상을 거머쥐게 도왔다. 분단 극복의 상징성이 큰 금강산 관광 뱃길도 열어주고 남북 철도 연결을 위한 삽질도 허용했다.
하지만 김정일이 남쪽의 전임 대통령들이 안달해 마지않던 그런 일들을 DJ에게 선물한 것은 존경지심 때문이 아니다. 철저히 수지타산에 따라 돈 되는 사업이라면 그는 마다하지 않고 결행했다. 소 떼를 끌고 온 현대 정주영 회장에 금강산 관광 허가를 내주는 대가로 9억4,000만달러를 챙겼다.
DJ의 평양방문 대가는 얼마였을까? 측근 실세인 박지원이라는 사람은 “단 1달러도 주지 않았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이걸 믿는 사람은 없다. 지금 한국 국회에선 “4억달러를 건네고 평양행 비행기표를 샀다”는 야당의 폭로를 놓고 난리법석이다.
김정일은 남쪽으로부터 돈만 챙긴 게 아니다. 남쪽의 마음까지 욕심냈다. “합리적이고 통 큰 지도자”라는 DJ의 평가가 나간 뒤, 김정일의 검은 선글라스가 유행했고, 젊은 세대에 “괜찮은 북한 통치자”의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다.
지난 주 막을 내린 아시안 게임에 임하는 김정일의 전략은 수준급이었다. 인공기를 나부끼며 북의 미녀 군단을 부산에 풀어 미소작전을 편 것이다.
“우리는 한 민족이야요, 평양에도 놀러 오시라요”하고 보조개를 지으며 웃는 평양 미인들에게 그 억세기로 유명한 ‘경상도 사나아들’은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며 환호했다. 여기에 DJ를 편드는 일부 미디어(TV)들이 멍청히 있었겠는가. 황금시간대마다 남남북녀가 어떻고, 고전미인의 표상이 어떻고 하며 북녀의 화사한 웃음과 메시지를 호들갑을 떨며 보도했던 것이다. 부산 체제 경비를 남쪽이 대준 것은 부잣집 인심 정도로 치더라도, 돈 쓰고 ‘사나아들’ 마음 빼앗아간 걸 생각하면 부화도 날만한 했던가. “북녀의 미소에 입을 헤벌쭉 벌린 남쪽 ‘사나아들’”을 나무란 남쪽 녀의 글들이 신문에 실린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말이다.
북한의 핵문제가 터진 것은 북녀들이 미소와 애교를 남쪽에 떨어뜨리고 돌아간지 일주일 만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게 그 때지 이미 워싱턴이 관련 정보를 입수해 우리 정부에 통보해 준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이 문제를 당국은 쉬쉬하며 숨긴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북녀들의 미소에 홀린 남쪽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김정일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결국 DJ의 햇볕정책으로 옷을 벗고 춤춘 쪽은 우리요, 알토란같은 돈 다발을 챙겨 군사장비를 현대화하고 음험한 지하 연구실에서 핵무기를 개발한 쪽은 북한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지략을 평가하고 북한 경외론을 편 필자를 문제삼는다면 이번에는 김정일이 폭소를 터뜨리지 않겠는가.
안영모 <언론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