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분리 비난보다 행정 개선 계기삼아야

2002-10-1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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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5일로 다가온 중간선거에서 LA주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샌퍼낸도 밸리의 분리 안이다. 밸리 주민들은 왜 분리를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 실현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짚어본다.

세금 더 내면서 괄시 받아온 밸리주민들 불만
시 지도자·저소득 흑인등 기득권층은 반대
LA시 공무원 높은 처우 불구 서비스는 바닥


이번 선거에서 LA시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것은 밸리 만이 아니다. 할리웃과 샌피드로도 독자적인 시 정부 구성을 바라고 있다. 이들의 꿈이 실현되면 제임스 한 LA 시장은 이사 짐을 싸야 할 판이다. 바로 새 독립시가 될 샌피드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럴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다. 처음부터 독립 열기가 뜨겁지 않던 할리웃과 샌피드로는 말할 것도 없고 한 때 LA 주민 과반수의 찬성을 받던 밸리 분리안도 지지율이 날로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 밸리 독립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수그러들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한 시장을 비롯한 시 정부 지도자들의 결사적인 반대다. 이들은 500만 달러의 거금을 마련하고 워렌 크리스토퍼와 매직 존슨 등 유명 인사 등을 총동원, 조직적인 반대 캠페인을 펼쳐왔다. 한 시장은 “밸리가 떨어져 나가면 LA 주민들은 성서적인 재난을 맞게될 것”이라고까지 위협했다.
이들이 분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반대 이유 중 재정 자립도가 낮다는 것은 가장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밸리가 독립하면 오히려 지금보다 세 부담을 낮추고도 돈이 남는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 이다.
LA가 둘로 쪼개지면 전국적인 위상이 낮아져 연방 및 주 정부 기금을 타내기가 어려워지며 밸리가 독자적인 시 정부를 가져 봐야 옥상옥 일뿐 능률적인 행정을 펴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 반대 이유다.
또 막상 갈라서게 되면 LA시 소유로 돼 있는 재산 분할을 놓고 수천 건의 소송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게 반대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탐정소설에서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흔히 나오는 이야기에 “돈을 추적해 보라”(Follow the money)란 말이 있다. 밸리 분리 안도 그 밑바닥에는 결국 돈 문제가 걸려 있다. 많은 밸리 주민들이 자기가 세금으로 낸 만큼의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밸리 분리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은 사우스 센트럴의 흑인 사회다. 이들은 LA 시의 재정 부담을 저소득층에게만 떠넘기고 중산층 거주지역인 밸리는 살짝 빠지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라고 비난한다. LA 지역 시 정부의 독립과 통합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LA 정부 통합위원회는 밸리가 떨어져 나갈 경우 매년 1억 2,800만 달러를 ‘위자료’ 조로 LA시에 지급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 위자료는 매년 5%씩 줄어들며 향후 20년 간 내야 한다.
이에 대해 한 시장을 비롯한 LA 시 지도자들은 “턱도 없는 액수”라고 펄펄 뛰며 매년 2억8,800만 달러씩 25년 간 낼 것을 고집하고 있다. 밸리가 떨어져 나가도 41개 시 부서 중 15개 부서는 한 푼도 예산을 깎을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세수를 밸리가 메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분리주의자들은 이같은 시청의 오만한 태도가 바로 독자적인 시 정부를 가져야 하는 이유라고 맞서고 있다. 1915년 싸게 물을 대준다는 구실로 LA 시에 통합된 후 지난 80여 년 간 돈만 뜯기고 푸대접받는 ‘압박과 설움의 세월’을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밸리는 인구로는 LA시의 1/3, 면적으로는 절반에 이르면서도 시의원 수는 과거 2명인 적도 있었다. 그 후 점차 늘어 지금은 4명이지만 아직도 인구 비례에 비해 부족한 형편이다.
LA 시 직원들은 미국에서 가장 처우가 좋은 공무원에 속한다. 30년 근속자의 경우 은퇴해도 최고 봉급의 70%가 죽을 때까지 연금으로 나오며 건강 보험 등 급여 외 혜택도 그대로 유지된다. 이런 비싼 인건비에도 불구하고 행정 서비스는 바닥에 가깝다는 것이 비판자들의 이야기다.
거기다 폭발적인 인구 성장에도 불구, 수십 년 째 15명의 시의원 수를 전혀 늘리지 않아 지금 시의원 한 명이 전국 최대 규모인 24만 6,000명의 주민을 대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LA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시카고가 50명의 시의원을 갖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대표해야할 주민 수가 많다 보니 지역 현안이 제대로 시정에 반영이 되지 않고 “시청이 너무 멀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지난 몇 년 간 시 행정이 개선되는 데는 그나마 밸리 분리주의자의 공이 컸다. 밸 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 헌장을 고쳐 주민 위원회를 만들어 지역 주민들의 발언권을 강화했으며 지난 수 년 사이 수십 개의 공원과 도서관 등 위락 시설을 더 지었다. 밸리 주민들의 불만 사항이던 시의원 수도 내년부터는 5명으로 늘려주기로 했다.
밸리가 독립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도 이를 시도했었으나 주법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 시장을 비롯한 LA 시 지도자들은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분리 운동을 막느라 엄청난 재원이 낭비된다며 이번 선거를 계기로 다시는 이런 주장이 나오지 못하게 못을 박아야 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그러나 밸리가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기를 쓰기보다는 밸리 주민들이 만족할만한 시 행정을 펴는 것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다.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식민지 실정을 무시한 영국의 일방적 정책과 대표 없는 과세였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지금 밸리의 현실이 그 때와 유사하다는 게 밸리 독립 운동 지도자들의 주장이다.
80여 년 간 같은 식구로 지내온 LA 시를 하루아침에 두 쪽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거액의 위자료와 장기간의 소송 사태 등 많은 부작용이 따를 위험이 있다. 분리가 되더라도 밸리가 독립 시 이름 후보의 하나인 전설의 낙원 ‘캐믈럿’(Camelot)이 되지는 않을 것 이다.
그럼에도 수 십 년에 걸쳐 밸리 분리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상당 수 밸리 주민들이 LA 시 행정에 깊은 불만과 불신을 품고 있음을 반증한다. 중간 선거에 부쳐진 밸리 독립 안을 백인 중산층 이기주의의 산물로 매도하기보다는 이를 보다 주민에 가까운 시 행정을 펴는 계기로 삼는 것이 시 지도자들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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