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의 장을 넘기자

2002-09-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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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국가적 정체성과 자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의식이 강해지면서 불가피하게 같이 강해진 것이 ‘그들’에 대한 구분이다. 미국을 고맙게 여기는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미국이 보이고 있는 존 웨인식 입장이 미국을 세계로부터 점점 고립시키지나 않나 우려가 된다.

최근 몇 달간 나는 볼리비아, 베트남, 티벳, 페루, 인도 등지를 여행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나는 같은 인상을 받았다. 세계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모든 사람의 관심의 초점이다. 그 관심에는 동경과 원망과 시기가 뒤섞여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슬람 과격파는 관심도 끌지 못한다.


1년 전 우리는 전 세계로부터 동정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 중에는 물론 인류가 대부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수퍼파워도 마침내 경험하게 되었구나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달이 가면서 미국은 점점 세계로부터 고립되어서 마침내 전혀 다른 혹성 같은 느낌이다.

인기가 없다는 것은 제국의 특징이기는 하다. 예를 들어 지난 1980년대 러시아를 좋아하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미국의 경우, 지구상에서 제일 어린 것이 제일 힘이 세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착잡해 한다. 힘은 경험에서 나오고 진실은 먼 과거에 존재한다고 믿는 역사가 오랜 나라들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다. 그들 나라에서 볼 때 미국의 지도자들은 훨씬 작은 나라 지도자들에 비해 훨씬 덜 세련된 반면 미국은 세계에 대해 뭘 배우려는 자세가 아니라 바꿔 놓아야겠다는 자세로 일관한다.

홍콩, 라파즈 등 어디를 가든 “미국은 돌아가라!” “미국은 아프간에서 물러가라!”는 사인들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미국은 우리를 좀 내버려 두라!” 말로 느껴졌다.

미국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회의의 타겟이 되고 있다. 뭔가 잘못되면 사람들은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탓하게 마련이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테러 때의 충격은 워싱턴이 이후 보인 반응 때문에 깎여나가는 것 같다. “미국은 언제나 그런 식이지. 답답한 걸 다른 불쌍한 나라들에 풀어버리는 거야”라고 그들은 말한다.

2002년 9월11일은 비극의 상징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미국이 겸허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고통의 끝에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 우리의 상처만을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피코 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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