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방세계의 ‘반미’

2002-09-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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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국제정치에서 가장 특이한 일은 미국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외로운 존재가 됐다는 점이다. 테러사건 이후 세계는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악의 축’발언과 함께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부시 독트린이 나오면서 반미가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우방인 유럽 제국들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유럽과 동일한 가치와 제도에 바탕을 두고 서구 민주주의의 리더로서 냉전시대를 지내왔다. 그런데 도대체 왜 유럽에서 반미가 퍼져가고 있는가. 이는 워싱턴이 신경을 써야 할 사안이다. 미국과 유럽의 알력은 미국의 교토의정서 서명철회, 국제형사재판소 반대 등 일련의 일방적 조치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들고 나온 것이다.

유럽은 룰에 근거한 국제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눈에 미국의 일방주의는 이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미국은 독립 국가의 정통성을 국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반면, 유럽은 민주적 정통성은 일개 국가에서보다 국제조직의 정통성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믿고 있다.국제법의 역할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이견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약소국들은 규범과 법으로서 강자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길 원하고 강자는 행동의 자유를 바란다. 둘째, 유럽통합의 과정에서 유럽 국들이 겪은 경험에 있다. 이들은 유럽통합 과정에서 민족국가의 주권을 상당부분 포기해야만 했다. 이들은 미국도 이 같은 길을 걷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이유는 미국의 독특한 민족적 경험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가치체계가 인류에게 모두 적용될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지구촌 일에 개입하게 하고 미국의 국익과 세계의 이익을 혼돈하게 만들었다. 이에 반해 전쟁의 참화를 겪은 유럽은 민족국가의 주권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한하는 국제적 제도를 만들어 냈다. 한 나라가 제멋대로 하길 막자는 의도였다.

미국이 대 이라크 강경책에 대해, 즉 개전 이유에 대해 유엔의 지지를 유도하는 게 반드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민주적 정통성이 민족국가에 있느냐, 국제조직에서 비롯되느냐 하는 유럽과 미국의 이견은 앞으로도 계속 시빗거리가 될 것이다.
미국은 절제와 중용의 자세로 이러한 갈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9.11에 지나치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워싱턴포스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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