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차기 총리의 자격

2002-09-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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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현 편집위원

청와대는 차기 총리를 물색하느라 초비상이다. 앞서 두 후보의 신원조회에서 "하자 없음" 하며 인준을 자신했다가 낭패를 보았으니 다급해진 이번 인선에서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자격요건을 채울 수 있다면 무난히 관문을 통과할 것이다.

우선 여성은 곤란하다.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임기를 미끼로 한다면 오히려 여성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여권신장이 아니라 여권경시로 비쳐질 수 있다. 여성의 지도력을 국정 수행에 빌리려는 것이 아니라 ‘얼굴마담’ 정도로 삼으려 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청와대로부터 후보 지명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단번에 "영광입니다"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은 안 된다. "수개월 단명 총리라도 좋다, 수십 년 수백 년 후 ‘재상 집안’이란 말을 듣기만 하면 된다"는 인물이라면 아까운 연금만 축낼 뿐이다. 유비의 간곡한 청을 거절한 제갈공명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한두 번의 완곡한 거부도 하지 않고 "웬 떡이냐"며 덥석 받는 사람은 자격 미달이다.


장교든, 병장이든, 방위 출신이든 병역에 추호의 미심쩍은 부분도 없는 인물이라야 한다. 본인은 물론 자녀의 군복무에 있어서도 떳떳해야 한다. 가뜩이나 대선 후보를 둘러싼 ‘병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데 총리후보까지 병역 문제로 발목이 잡힌다면 나라꼴이 말이 아닐 게다.

투기 전력이 화려한 사람은 ‘인재 풀’에서 솎아내야 한다. 재산이 많고 적음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땀흘려 번 돈이라면 탓할 수 없지만 투기로 부자가 됐다면 ‘국민을 아끼는 정부’의 총리직에 걸맞지 않는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돼 계층 간 위화감이 어느 때보다 심한 요즘이니 더욱 그렇다.

김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하의도와 호남의 대표격인 광주 출신은 상징성의 문제로 시빗거리가 될 수 있으니 배제하는 것이 좋다. 설령 호남이라도 문제의 두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 출신이라면 별 탈이 없을 게다. 얼마 되지 않는 재임기간에 권력을 이용해 이득을 챙길 여유가 별로 없을 테니, "호남 사람들이 말아먹는다"는 빈정거림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총리는 이 시점에서는 부적절하다. 현정부의 장관들이 대다수가 60대이다. 탁월한 영도력과 친화력을 겸비하지 않는 한 나이 많은 한국의 장관들을 이끌어갈 수 없다. 게다가 차기 총리는 막판에 급히 구한 사람이니 만큼 태생적 한계를 숨길 수 없는 형편이다. 누가 되든 제대로 위엄을 세우기 힘들게 돼 있다. 그러니 "구상유치하다"는 뒷말까지 들으면서 정부를 통솔할 수 있겠는가.

재계나 언론계 출신은 1순위에서 제쳐두어야 한다.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니 하는 잡음이 정권 말기를 온통 시끄럽게 할 수 있다. 다만 소속된 기업이나 언론사와의 소유관계에 있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는 신중히 고려해 볼 수 있다. 일례로 경영능력이 빼어난 ‘봉급 받는 CEO’는 물망에 오를 수 있다.

권모술수에 능한 야심가는 부적격자다. 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고분고분한 총리를 바라는 청와대가 이런 후보를 천거할 리 없겠지만, 후보지명을 받게 되더라도 재임 중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압박감에 좌충우돌해 오히려 나라 일을 어지럽힐 수 있다.

이념적으로 진보나 보수 성향이 뚜렷하지 않은 인물이 알맞다. 남북관계를 둘러싸고 보수 진보 세력이 칼날을 세우고 공격기회만 노리고 있으니, 보수적 인사가 후보로 나서면 진보언론에서 치받을 것이고 진보적 인사면 보수언론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념적 편가르기를 심화시켜 모처럼의 남북 화해 분위기를 깨칠 수 있다.

부정선거 연루자는 보나마나 탈락이다. 차기 총리는 선거관리 총책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과거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부정선거에 개입됐던 사람에게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기대하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퇴임 후라도 정권 말기의 문제점 등을 적시해 정치발전에 기여할 용기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면 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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