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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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투의 종말

2002-08-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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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대통령 선거를 넉 달도 안 남긴 요즘 한국의 정치판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폭풍전야와도 같다. 폭풍 전야는 그나마 적막감이나 나돌려만 이건 아비규환의 혈투의 현장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혈투현장은 언제나 선혈이 낭자한 법이다. 지금 정치권이 꼭 그렇다.

지방 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압승, 기세를 올리며 선두를 달리던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아들 병역문제로 집권 세력으로부터 연일 어퍼컷을 당하고 있다. 집권 여당의 조작이라고 악을 써 보지만 일단 공격을 당하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게 마련이다.

무명에서 일약 정치 기린아로 발돋움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도 목하 빈사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다. 당내 민주적 절차에 따라 후보 티킷을 땄다고 어깨를 편 게 엊그제나 지금 같아선 대선 후보가 아니다.
민주당의 ‘미운 오리새끼’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민주당 내 반노(反盧) 세력들로부턴 대선 열차 표를 내놓으라며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있다.


여당과 야당간에, 또는 여당 내의 치고 받는 싸움으로 정치권은 날이 갈수록 선혈이 짙어만 간다. 권력 쟁취가 정당의 존립 가치임을 부인할 수 는 없다하더라도 한국의 정치판에선 규칙도 금도도 체면도 깡그리 사라졌다. 무작정 터뜨리고 보자는 폭로, 대결 규칙을 무시한 반칙 공격, 자기편만이 항상 옳다는 독선, 밀리면 죽는다는 강박관념이 정치인들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도시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신은 사망한지 오래다.

선혈이 낭자한 결투판을 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고약하다는 생각들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도 선 듯 어느 한 쪽을 두둔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회창 후보의 병역 문제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들 둘을 모두 군대에 보내지 않은 것은 잘못한 일이라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 체중 미달이라는 적법 절차에 따라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는 하나 영양보충이라도 시켜 몸무게를 늘려 군대에 입대시켰어야 했지 않느냐는 소박한 아쉬움에서다.

그런 한편으로 이회창 후보가 이 문제로 지난 대선 때 혹독한 시련을 겪고 결과적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으로써 충분하지 재탕삼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들도 없지 않다. 거기다가 권력을 잡고 있는 집권 세력이 신분도 묘연한 한 인물을 내세워 ‘병풍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데는 필시 곡절이 있으리라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DJ 경기 심판으로 나서라
이런 난국이 닥칠 때 양쪽을 오가며 타협의 장을 이끌어 낼 정치 지도자가 전무하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다. 전직 대통령들이란 사람들이 하나 같이 ‘정치적 불구자’가 된 상태니 누가 나서 싸움을 말리고 심판을 보겠는가. 심판 없는 결투에 경기 규칙이 있을 리 만무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파행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5 년 전에도 유사한 일로 혈투가 벌어진 적이 있다.

바로 김대중 후보가 노태우 전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 플러스 알파’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고 당시 이회창 후보측이 공격하고 나선 사건이다. ‘광주 사태’의 주역인 노태우씨로부터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으며 20억원외에 더 받은 액수는 얼마인지 밝힐 것과 이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라고 주장했다.
김대중 진영이 이 문제에 대해 취한 반격은 지금 이회창 후보 쪽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야당 후보를 음해하기 위해 안기부와 이회창 후보측이 정치 공작을 하고 있다고 반격했다. 검찰을 압박한 것도 물론이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지금과 그 때의 현격한 차이점이다. 당시 집권자인 김영삼씨가 오히려 김대중 후보 쪽에 섰다. 검찰 수사를 대통령 선거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경기 심판을 자임한 것이다. 현직 검찰총장인 김태정씨는 나중에 드러났지만 김대중씨 편이었다. 이로써 이회창 진영의 공세는 무위에 그쳤다. 한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로부터의 중립’만을 강조하며 민주당의 병역 공세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출신 지역 탓에 야당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담당 검사는 목이 날라가도 병역의혹의 실체를 밝혀내겠다고 패기만만이다. 5년 전 현직 검찰총장의 야당후보 감싸기와는 딴 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혈투를 종식시킬 하나의 방법이 떠오른다. 김대중 대통령이 불편부당한 심판 역을 자임하고 나서는 일이다. 5년 전 자신이 겪은 혹독한 시련을 생각해서라도 여야 휴전과 병역의혹 수사에 대한 모종 단안을 내리는 결단이다. 예를 들어 정치자금 수사를 대선 뒤로 미룬 97년의 해법을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이는 전적으로 김 대통령의 몫이다. 그러나 모종 단안을 내리지 않는다면 정치권 혈투는 계속될 것이고 그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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