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축구장으로 가는 길

2002-08-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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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오먼 칼럼

크리스천 라이프가 주최한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103명의 단기 선교단원 중에서 한국계통이 아닌 사람은 나 혼자였다. 올해는 한국서 온 할렐루야 축구팀이 동참하여 활력을 불어넣었다.

코치인 이영무 목사님과 그의 아내, 그리고 21명의 선수로 구성된 팀은 2주 동안 9번의 시합을 우간다 수도 캄팔라, 르완다 수도인 키갈리, 르완다 대학도시인 브타래, 그리고 콩고 브카브에서, 현지팀과 시합하며 선교하였다. 나는 3번의 축구게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중 나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게임은 콩고 브카브에서 있었다.

콩고팀과 시합 전날 우리 단원들은 르완다 사역을 마치고 콩고로 왔다. 축구팀과 선교단원들이 콩고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 브카브 지역 정치인들과 교계 인사들이 군악대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하는 기이한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을 이처럼 국빈 대접하여 준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다른 일행을 환영하나 보다 하였는데 우리가 그들의 환영의 대상이었다.


르완다와 가까운 브카브는 콩고 수도인 킨챠사에 있는 중앙정부에 반발을 하고있는 상태이며, 현재는 르완다 군대가 거리를 순찰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서양사람들과 잘 산다는 현지인들은 전쟁의 위험을 피해 몇 년 전에 이곳을 떠났다 한다. 외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던 시민들은 우리의 방문을 무척 반가워하였다. 그래서인지 정부가 나서서 우리들을 국빈 대접하였다.

브카브 지역은 근래에 들어 3번이나 치른 내전으로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1994, 96, 98년에 있었던 전쟁으로 시민들은 지쳐 있었고 생필품이 없어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더구나 8월은 건조기이어서 황토 먼지가 거리와 건물을 덮고 있었다. 벨기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유럽식 도로는 돌밭으로 변해 길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길이 어찌나 험한지 차에서 내리면 머리가 멍하였다 (머리를 많이 찧어서). 경기를 하기 위해 우리가 탄 버스는 스태디엄으로 향하였다.

길은 꽤 큰 도로였는데 어느 순간 시장으로 변하였다. 길 가장자리에서 물건을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도로 한복판을 헤쳐가며 걷고 있었다. 아프리칸 얼굴이 아닌 무중구들로 가득 찬 버스를 보고 수천명이 멈추어 우리의 길을 막는 바람에 차는 인파 속에 묻혀 움직이지 못하였다. 바나나를 싣고 앞서 가던 트럭도 인파를 헤쳐가느라 수시로 멈추었다.

트럭이 멈출 적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차에서 뛰어내려 타이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쇠붙이를 놓았다가 차가 움직이면 쇠붙이를 집어들고 차로 뛰어가서 타곤 하였다. 트럭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는지 멈추는 곳마다 아이는 뛰어 내려 차가 뒤로 굴러 가지 않도록 브레이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를 우리는 ‘브레이크 보이’라고 불렀다.

버스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숫자에 놀랐고, 가난과 전쟁의 공포로 굳어진 그들의 처참한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우리 버스를 운전하던 르완다 운전사가 경적을 울리면 사람들이 순간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차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차창을 두드리면서 돈을 달라고 하기도 하고, “무중구”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몇 마일의 거리를 한시간 정도 걸려서 차는 두터운 인파를 뚫고 나왔다. 축구장으로 가는 한시간의 여행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시간이었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군인들이 우리를 에스코트하여 주었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길거리의 아이들은 신명이 나서 우리들을 에워싸면서 구걸하였고, 동양인을 처음 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호기심 때문에 우리 일행은 거의 밟혀 죽을 뻔하였다.

이러다가 혹시 폭동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생겼다. 차가 움직이자 인파는 서서히 길을 열어 주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던지 아니면 다른 위성에 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할렐루야 팀이 현지 콩고 팀을 2대1로 이겼다. 인생에서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축구장으로 가는 여정이 도착지에서 있었던 일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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