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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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권은?

2002-07-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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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 안영모 (언론인)

정권이 존립하려면 최소한 3가지 덕목은 갖추어야 한다.

그 첫째가 도덕성이다. 도덕적으로 떳떳치 못한 정권은 사상 누각이다. 정권의 정통성(Legitimacy)은 물론이고 집권 후 권력 주체들의 도덕적 청렴성이야말로 그 정권이 갖춰야할 으뜸가는 조건이다.

두 번째는 신뢰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백성들로부터 믿음을 얻어야 영(令)이 서고 그래야 나라꼴이 반듯해 진다. 신뢰를 받지 못하는 집권자가 큰소리 땅땅 쳐 봤자 백성들은 "웃기네" 하면서 코웃음을 치게돼 있다.


책임성이 그 세 번째다. 정권이란 일정기간 백성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수임세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위임한 쪽에 무한책임을 질 각오로써 국정을 맡아야 한다. 국정 수행능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책임성이 강한 정권이라면 백성들이 이해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현 김대중 정권은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매우 유감스럽지만 3가지 요건에 크게 미달한 부적격론에 가깝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짚어보자. 먼저 도덕적 가치 기준에서 김대중 정권은 합격인가. 정치인 김대중이라는 개인의 도덕성과 집권 전후의 정치적 연대를 놓고 ‘위선과 야합’이라는 일부 평가가 있기는 했지만 민주화 투쟁의 공로 만으로서도 정권의 정통성은 인정될 만하다. 그러나 집권 후 이 정권의 중심 세력들이 걸어온 길은 결코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했다. 부정과 부패, 이것 하나만으로도 현 정권의 도덕성은 이미 붕괴됐다. 대통령 아들들과 핵심 측근들, 청와대 비서관들, 권력부처의 고위직들이 온갖 비리사건에 연루돼 김 대통령 자신이 서너 차례 국민들에게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기록들이 이를 웅변으로 대변한다.

신뢰성은? 말 그대로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백성들의 귀는 열리지 않는다. 교육제도, 의약분업, 농업정책, 정의사회 구현 등 이 정권이 내 건 국가 대소사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강행된 정책은 4년 반의 세월이 지난 지금, 빛깔이 바랬거나 땅 속에 묻히고 말았다. 교육 현장은 사제간에, 선후배 교사간에 반목과 도덕적 패륜 사태로 얼룩졌다. 준비 안된 의약분업을 밀어 붙여 의사와 약사간의 대결구도를 조성, 국민 건강을 담보한 사회혼란을 야기했다. 최근에 와선 중국과의 농업협상을 놓고 거래 내용을 쉬쉬 감추어오다가 들통이 나 난리법석이다.

김대중 정권의 간판정책인 ‘햇볕정책’에 대해선 왈가왈부하기도 지쳤다. "식상했다"고 말하는 여론이 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해교전과 관련, 북측으로부터 "우발적 충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옳다구나 하면서 "곧 쌀을 보내주마"고 반색하고 나섰다. 여론의 반응이 골을 내자 슬며시 신중론으로 돌아서긴 했지만 쌀가마를 선적한 우리 화물선이 북녘으로 달려갈 것이다.

마지막 자격론인 책임성에 관한 것 역시 고개를 내젓게 만든다. 김 대통령은 셋째에 이어 둘째 아들이 검찰에 구속 수감되자 대 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말처럼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을 이런데 인용해서 안 됐지만, 바로 그 "철면피"라는 표현이 이 정권의 인상을 가장 적절하게 자평한 것이라면 지나친 폄하일까.

여기 저기서 펑크가 나고, 이 정책 저 정책이 휘청대는 되도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자인하는 소리는 감감하다. 바로 이 게 김대중 정권의 가장 나쁜 구석이다. 이런 면피 자세는 어느 한 부처의 국한된 병고가 아니다.

김 대통령부터 그렇다. 집권 이후 전방위 로비와 이권 개입을 저질러 온 아들들의 일탈행위를 몰랐다고 했다.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국가의 온갖 정보망과 광범위한 접촉 범위를 갖고 있는 대통령이 그만한 정보를 보고 받지 못했다? 이 말을 과연 믿어야하나?

정말 보고를 받지 못한 게 사실이라 치자. 이건 더 큰 문제다. 국가 원수 앞으로 가야할 중요 정보가 차단되거나 누락됐다는 이야기니 이 게 보통 일인가 말이다. 이는 대통령의 국정 운영과 관련된 치명적 하자다. 국가 정보기관들에겐 국정 농단과 직무유기의 엄중한 죄를 물을 만한 일이다. 어떤 경우 건 명백한 사실은 김 대통령이 이 문제에서 면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늘 문제에서도 어김없이 면피 행진은 계속됐다. 외교 협상 내용을 숨긴 이 문제를 놓고 청와대, 외교 통상부, 농수산부는 하나 같이 "우린 책임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만 믿고 마늘 재배를 늘린 농민들에게 책임이 있단 말인가. 농민들로선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다. 도덕성, 신뢰성, 책임성 그리고 이 세 덕목을 관통하는 정직성을 상실한 정권의 존재 기반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남은 반년 임기, 그 기간이 정말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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