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한인 소녀가 지난 주말 교회 한글학교를 파하고 목이 말라 한인타운에 있는 편의점 ‘7-일레븐’에 들어가 주스 한 컵을 주문했다. 비교적 또렷한 액센트로 “아저씨, 주스 한 컵 주세요” 했다. 마침 계산대에서 주문을 받던 한인은 “너 한국에서 언제 왔니?” 하며 흥미 있어 했다. 이 소녀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아저씨, 저는 이곳에서 태어났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러니?” 하며 대견스러워했다. 이 주인은 소녀가 하도 한국말을 잘 해 조기유학생 아니면 몇 년 전쯤 이민 온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7-일레븐’ 주인과 딸의 ‘작은 해프닝’을 접한 아버지는 “한글학교에 꾸준히 다닌 덕”이라며 흐뭇해했다. 한글학교 고학년으로 갈수록 공부하기 싫어하고 게을러져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 아버지는 ‘뿌리교육’ 차원에서 한글교육에 좀 더 관심을 둘 생각이란다.
이 아버지처럼 대다수 한인 부모는 자녀의 한글교육을 뿌리교육 관점에서 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한글교육은 자녀들이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고 부모 세대와의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힌다는 ‘여유로운’ 영역에 머물 수 없다. 우리 자녀들이 주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 것이다. 한글교육은 이제 생존교육이다.
주류사회 기업들은 한인 직원들에게 한인 시장을 책임 지우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것을 요구한다. 모든 것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돼 가는 추세이니 ‘한인이 한인사회를 맡는 식’의 전략은 기업으로선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일 것이다.
일례로 법률회사들이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명문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돼 법률회사에 취직한 뒤 빛을 발하기는커녕 회사에 붙어있기도 벅차 고민하는 한인 2세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회사에서는 중국 커뮤니티는 중국인, 일본 커뮤니티는 일본인, 한인 커뮤니티는 한인 변호사에게 일임하지만 한인시장을 맡을 능력이 없는 한인들이 드물지 않다. 이들은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늦깎이 한글공부를 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유별나게 한글공부를 싫어했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어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부모가 자녀의 한글교육에 등한시 한 경우도 적지 않다. 회사에서 살아남으려고 교회의 주말 한글학교를 다녔다는 30대의 한 변호사는 어려서 자신을 한글학교에 보내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느 업종이나 한인시장이 있고 이는 대개 한인 직원이 담당하게 된다. 한인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실적을 올리려면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무능한 직원으로 찍히게 되고 최악의 경우 ‘퇴출’된다.
반드시 해야 하는 한글교육은 학생, 교사, 학부모가 연출해 내는 ‘3중주’다. 2세들에겐 한글을 배우려는 열의가 있어야 한다. “쓸모도 없는 어려운 말을 배워서 뭐하나?”라고 물을 것이 아니다. 부모나 친척들과 대화하기 위해 배우라는 게 아니라 주류사회를 헤쳐 나가기 위해 익히라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게 그리 한가롭지 만은 않다. 전장에서 아무리 고성능 총을 갖고 있고 사격을 잘한다 해도 총알이 없으면 눈앞의 목표물을 잡지 못하고 애만 태우는 법이다.
최근 한글학교 학생이 90년대 중반에 비해 현저히 줄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특히 저학년의 경우 그 감소폭이 더 크다. 1.5세 학부모들이 증가해 그만큼 자녀의 한글교육에 덤덤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1세 부모들은 바빠서 자녀의 한글교육에 무신경할 수 있다. 하지만 한글교육은 많은 경우 자녀들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주류사회 기업들이 한국어를 잘하는 직원을 선호하고 한국어를 모르면 어렵사리 들어간 좋은 직장에서 순식간에 ‘팽’당할 수 있음을 주지시켜야 할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열의를 보여도 학교측이 무성의하면 맥빠진 교육이 되고 만다. 주말 한글학교 교사들은 봉사 차원에서 얼마 되지 않는 수고비를 받고 일을 한다. 한 두 달도 아니고 장기간 이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간혹 ‘나사’가 풀릴 수도 있다. 만일 ‘적당주의’로 가르친다면 모두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학비를 현실화해서라도 내실을 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주류사회에서 제몫을 다하려면 한글을 알아야 한다. 학생, 학부모, 주말학교측이 한글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공동 노력을 기울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