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엘에이에 흐린 날씨가 이틀째 계속됐다. 동부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남가주에서 온 학생들이 왜 그리도 매일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엘에이에서 10년 정도 살고 보니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같은 날씨만 되풀이되며 낮은 습도에 햇빛이 쨍쨍하니, 조그만 기상 변화에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는 흐린 날이나 비오는 날 등이 그저 나쁜 날씨 라기 보다는 평소와 많이 다른 커다란 변화로 느껴진다.
엘에이에 와서 제일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날씨였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고, 사계절 중 겨울을 제일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일 계속되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결코 즐길 수 없었다.
영화나 TV 프로를 봐도, 동부의 오래된 도시 붉은 벽돌 아파트 담장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유난히 기억에 남곤 하였다.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하면, 겨울 아침에 일어났을 때 코가 찡하게 느껴지는 옅은 햇살과 찬 공기가 어김없이 생각났었다.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운전을 하는 중에 브람스나 바하 등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의 곡이 라디오에서 나올 때였다. 매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강한 햇빛이 내리쬐는 남가주의 메마른 날씨란 브람스와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엊그제는 공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간 나의 전 룸메이트 영희언니가 전화를 했다.
폴란드에 비네아프스키 국제 바이얼린 콩쿨 반주자로 참여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한 것이었다. 가장 감동스러웠던 기억은 콩쿨이 시작하기 전 날의 컨서트였는데, 초대 손님으로 참여하여 연주를 한 바이얼리니스트의 기량도 훌륭하였지만, 무엇보다 그 곳 오케스트라가 컨서트 후반부에 연주한 브람스 심포니 1번이 너무나도 좋았다고 했다.
학부 재학 중, 우리 학교 오케스트라가 두번이나 연주했던 곡이라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악장에서 다장조로 연주되는 저현의 멜로디가 얼마나 심플하고 감동적인지에 대해 침을 튀며 서로 공감하고 이야기 나누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가서 브람스 교향곡 1번 씨디를 사 들고 들어왔는데, 그 날은 밤이 너무 깊어서 제대로 듣지 못하였고,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매일 햇빛 쨍쨍한 날씨 덕분에 들으면서도 맥이 빠져버렸다.
그 씨디를 꾸물꾸물하며 곧 비를 뿌릴듯이 낮게 내려앉은 구름 투성이의 잿빛 하늘아래,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를 구분하기 힘들만큼 쑥 내려가버린 기온 속에, 약간 쌀쌀함을 느끼며 듣는 것은 어제 저녁 나를 너무도 행복하게 했다. 털 슬리퍼를 신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금방 끓여낸 커피를 손에 들고 그 냄새를 맡으며, 얇고 따뜻한 담요 한 장을 무릎에 덮고 앉아 듣는 브람스 교향곡 1번 덕분에 모든 근심 걱정을 한순간 잊을 수 있었다. 흐린 날 듣는 브람스는 동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엘에이에서 훨씬 더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