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태’(亞太)와 ‘일해’(日海)

2002-03-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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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서울에서 발간되는 한 시사 주간지의 표지가 눈길을 끈다. 커튼을 제치자
돈 다발이 켜켜이 쌓여있는 한 건물의 실루엣을 실었다. 한 일간지 시사만평에는 매우 해학적인 풍경이 묘사됐다. 별 셋을 단 해군장성이 모처를 방문한 뒤 별 넷으로 바꿔 달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나오는 장면이다.
두 현장 모두 ‘아태평화재단’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Kim Dae-jung Peace Foundation’이라는 영문표기도 눈에 띈다. 요즘 세간의 입 초시에 오른 김대중 대통령의 ‘아태재단’에 대한 한국 언론의 시니칼한 고발기사들이다.

아태재단이 세간의 눈총을 받게된 것은 재단 이사로서 재정문제를 전담해
왔을 뿐 아니라 근 20년 동안 DJ의 최측근으로 일해 온 이수동이라는 사람
이 문제의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돼 특별검사에 의해 구속되면서부터다. 이씨가 벤처 사기극의 주인공인 이용호씨로부터 5천만원을 받은 것은 본인이 자백한 것이지만 특검 주변에선 더 많은 자금이 흘러 들어갔으며, 정부 요직 인사에도 폭 넓게 개입해 왔다는 혐의를 받고있다.

특검 수사로 다른 혐의가 추가로 나올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이씨의 행적
을 보면서 YS정권 하에서 벌어진 아들 김현철씨의 ‘국정 농단’과 또 전두환 정권 당시 친제 전경환씨의 실세행각이 연상됨은 지나친 비약일까. 과연 이씨가 DJ정권의 실력자로 행세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정계와 언론계에 나도는 소문대로 아태재단은 DJ정권의 "보이지 않는 실세 부서"인가. 이씨가 지난 4년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DJ의 각별한 신임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DJ의 둘 째 아들 홍업씨가 재단 부이사장으로 앉아 있으니 알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씨의 월권 행각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아태재단에 대한 여론은 매우 부정
적으로 흐르고 있다. 먼저 학술 연구소라는 성격에 맞지 않게 기금과 예산
및 건물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점이다. 재단이 발족한 94년부터 2000년까
지 거둬드린 후원금이 무려 213억원, 미화로 약 1700만달러에 이른다. 야당
에선 정부기관에 보고한 공식 결산일 뿐 실제 후원금은 그 몇 배가 될 것이
라고 주장했다. 아태재단 건물은 DJ가 살던 동교동 집과 그 주변 토지를 구
입해 연 면적 1500평의 지상 5층 지하 2층의 번듯한 모습을 갖추고 지난해
말 준공됐다. 건축비만 80억원(약 6백만 달러)이 들었다고 한다.

두 번 째 문제는 아태재단이 DJ의 집권 산실로, 집권기간 중에는 인사 발
탁처로 활용됐으며 퇴임 후엔 정치적 영향력 행사의 축으로 이용될 가능성
이 크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무늬만 연구소이지 실제로는 DJ 개인의 "정치
센터"라는 것이 세간의 눈총을 받는 소치다.

셋째, 후원금 모금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 국회
의원과 지자체 선거 후보 공천자들로부터 공식 후원금은 물론 쿠폰매입이라
는 반강제적 별도모금을 통해 막대한 돈을 모았다는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
는 이미 ‘화약고’가 되고있다. 넷 째, DJ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사장직을 둘째 아들 홍업씨에게 물려주었다. 말하자면 재벌 기업주가 2세에게 대물림을 해준 거나 진배없는 형상이다. 아태재단이 실세 기관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자면 대통령 아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섯 째, 재단을 둘러싸고 세론이 분분한데도 DJ는 모금 내막이나 향후 처
리 문제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국가의 통치자라면 자
신이 관련된 비난 여론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책임있는 행동이 아
니다.

아태재단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는 예측 불허다. 야당에선 국회 청
문회와 특검 수사를 추진하겠다고 벼르고 있으나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아태재단에 대해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일부 언론들은 "제2의 일해재단이 될 가능성이 짙다"고 진단한다. 일해재단은 전두환 전대통령 재임 시 그의 아호를 따서 건립됐으나 퇴임 후 해체된 연구기관을 말한다. 성남시 서울 비행장 옆 부지 6만 평에 연 건평 3500평의 호화 ‘아방궁’을 짓고 퇴임 후를 준비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은 뒤 국가에 헌납한 문제의 연구소(현 세종연구소)다.

현대 정주영씨 등 재벌들로부터 무려 6백억원을 훑여내 세웠지만 정권이 바
뀌고 열린 5공 청문회에서 DJ 지휘하의 평민당 국회의원들로부터 융단폭격
을 받고 전씨가 두 손 든 사건은 아직도 국민 뇌리에 생생하다.
한데 이제는 DJ의 아태재단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 세상은 돌고 도
는 것인가. 정권은 유한한 것, 퇴임 후를 준비한들 성공한 경우가 없다는 교훈이 이번에도 적중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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