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만난 한국사람

2002-03-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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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먼 칼럼.

얼마 전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 대학생 기독연합회 주최로 열린 모임에 갔다. 초청된 여자 강사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였다. 강사의 이름은 스테파니 패스트이다. 다음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테파니 패스트는 한국에서 전쟁 직후에 태어났다. 그녀는 자기 생일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아버지는 미군이었고 어머니는 접대부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할 뿐, 사실을 모르기에 아무 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단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은 기차역이다.

나이가 많은 여자가 그녀를 기차에 태워주면서 기차가 멈추면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하는 말을 믿고 기차에 올랐다. 물론 아무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다섯 살쯤 되었던 그녀는 기차역에 버려져 고아가 된 것이다.


’튀기’라는 이름이 그녀가 기억하는 한국 이름이다. 튀기로서 세 번의 혹독한 겨울을 산과 들을 돌아다니면서 거지생활을 하였다. 추운 겨울밤에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굴속이나 다리 밑에서 불을 피워 몸을 녹이기도 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훔쳐먹다가 잡혀서 죽도록 매를 맞은 기억이 있다.

일곱 살이나 여덟 살쯤 되었을 때, 그녀는 콜레라로 거의 죽게되어 쓰레기장 버려져 신음하고 있었다. 밤늦게 그 곳을 지나가던 스웨덴 선교사가 신음소리를 듣고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고아원에 들어가서 건강을 회복한 후, 1960년에 미국 선교사 부부에 의해 그녀는 입양되었다. 튀기가 딸 스테파니가 되어 선교사 부모님과 함께 미국에 왔다.

선하신 양부모의 사랑 속에서 그녀의 육신적인 삶은 나아졌지만, 정신적인 상처는 치유를 받지 못한 채였다.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고 홈 커밍 퀸이 되고 주위에서 칭찬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자신을 더욱 더 혐오하게 되었다.

자기 안에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가 그녀를 옭아매어 사춘기 시절에 몇 번씩이나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극도의 절망에 처한 어느 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다. 자기를 버린 부모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삶은 기적처럼 변하였다는 간증이다.

그녀의 간증이 특별히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나의 아이들도 그녀처럼 튀기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만약에 나의 두 아들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스테파니처럼 그 시절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러한 구박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교회 2층 발코니에 앉아서 그녀의 간증을 듣는 중 "이 여자를 어디에선가 전에 만나지 않았나" 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1953년쯤에 태어났고, 테네시주로 입양되어 와서 중부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희미하게 기억되었다.

1972년 나는 인디애나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평화봉사단에 가입하여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대학생 기독연합회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한국 사람이 캠퍼스를 방문하고 있다며 스테파니라는 여학생을 소개하였다.


그 시절에 특히 인디애나 주에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테파니는 내가 처음 만나 본 한국사람이었다. 그녀는 양부모와 함께 모임에 참석하였던 것 같다. 한국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는 한국에 대하여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 간 후에 그 여학생과 몇 통의 편지가 있다가 연락이 그쳤다.

모임이 끝난 후에 강사에게 혹시 1972년에 인디애나주에 방문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의 설명을 듣고 있던 그녀는 웃으면서, 볼스테이트 대학에 진학할까 하여 인디애나에 간 적이 있다고 하며 우리가 잠깐 만난 것을 그녀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30년 전에 내가 처음 만나 본 한국 사람을 다시 만난 것도 놀라운 일이고 한번 만났던 사람을 서로를 알아 본 것도 놀라운 일이다. 다행히도 그때 그녀를 잘 대접하여 주었고, 신사도를 발휘하였기 망정이지.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모른다. 과거에 알았던 사람을 만날 때 회상의 기쁜 순간이 될까 아니면 창피하여 숨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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