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이미지 확 바꾸지 않고는 장래 없어
리오단, 김칫국부터 마시다 몰락 자초
데이비스, ‘남의 잔치’ 끼여들기 일단 성공-부제
가주 선거 사상 보기 드문 이변이 벌어졌다. 최근까지 공화당 주지사 후보로 당선이 확실시되던 리처드 리오단(71) 전 LA 시장이 빌 사이먼(50)이란 정치 신인에게 49%대29%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나가떨어진 것이다. 이번 선거의 파장과 11월 본선 전망 등을 진단해 본다.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는 말이 이번처럼 실감나는 경우도 드물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LA 시장직을 두 번이나 무난히 수행했고 지명도나 자금력에 있어 타 후보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오단이 공직 경험이 전무한 무명인사에 참패한 것이다.
리오단은 일찌감치 공화당 예선은 ‘따 놓은 당상’으로 생각하고 본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공화당내 지명을 받기 위한 선거임에도 골수 공화당원들에게는 금기사항인 낙태와 동성연애자 권리를 강조하는가 하면 나를 따르지 않으면 가주 공화당의 앞날은 없다고 설교까지 했다.
가주 유권자의 대부분인 리버럴 성향인 점을 감안, 현직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여성과 소수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리오단뿐이라는 판단 아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는 온건파 리오단의 출마를 종용했으며 유세 기간에도 그를 적극 지지했다.
리오단이야말로 데이비스의 가장 무서운 적수라고 생각한 사람은 부시뿐만이 아니다. 데이비스 자신도 여론 조사 결과 리오단 지지율이 자기보다 높게 나오자 남의 잔치인 공화당 예선에 끼여들어 리오단 깎아 내리기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데이비스가 예선 기간 리오단 비난 캠페인에 쏟아 부은 돈은 1,000만달러로 리오단과 빌 사이먼이 쓴 돈을 합친 것보다 많다.
데이비스가 이처럼 거액을 쓸 수 있었던 것은 4,000만달러에 달하는 막강한 정치자금을 확보해 뒀기 때문. 60이 넘어 정계에 뛰어들어 실언을 밥먹듯 하는 아마추어 정치인 리오단과는 대조적으로 30대부터 제리 브라운 전 가주 지사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데이비스는 각본 없이는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정치자금 모으는 것을 제1 순위로 아는 전형적인 직업 정치인이다.
빌 사이먼의 승리로 데이비스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지만 아직 11월 본선에서의 승리를 안심하기는 이르다. 데이비스는 지난해 가주 전력난이 닥쳐올 것이 뻔히 보이는 데도 무대책으로 일관하다 일이 벌어지고서야 뒤늦게 전력회사와 시장 가격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을 주고 장기 계약을 맺는 바람에 가주 정부는 엄청난 손실을 봤다.
거기다 닷컴 붕괴 이후 실리콘밸리 경제가 엉망이 되는 바람에 세수는 대폭 줄어들었다. 100억달러가 넘는 가주 예산 적자를 메우려면 세금을 올리거나 예산을 삭감해야 하는데 둘 다 표를 깎아 먹는 요소들이다. 작년 여름 이후 데이비스 주지사의 지지율은 50%를 넘지 못하고 있다. 현직이 50% 이상을 유지하지 못하면 재선 적신호라는 게 정치 분석가들의 얘기다.
이번에 리오단을 꺾고 일약 공화당의 스타로 등장한 사이먼은 포드와 닉슨 행정부 때 재무장관을 지낸 빌 사이먼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잘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 밑에서 검사로 일한 인연 때문에 이번 유세 기간 줄리아니가 따라다니며 지원 연설을 한 덕을 톡톡히 봤다. 막연한 포용을 강조한 리오단과는 달리 감세와 규제 완화, 낙태 반대와 총기 소유권 지지 등 공화당의 단골 메뉴를 강조, 선명성을 강조한 것도 공화당 보수파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유권자의 대부분이 리버럴 성향인 가주에서 이런 이슈들로 주지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선에선 오른 쪽으로, 본선에선 가운데로" 뛰라는 닉슨의 가르침대로 당내 지지기반을 다진 후에는 중도 표를 잡아야 승산이 있다. 이번 리오단의 어처구니없는 패배도 일단 ‘우향후’ 하는 첫 단추를 끼지 않고 뒷단추부터 채우려다 발생한 불상사라 볼 수 있다.
가주는 2000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공화당의 부시 대신 민주당의 고어를 지지했다. 한 때 닉슨과 레이건 등 공화당의 대표적 대통령을 배출했던 가주가 이제는 주지사와 주 의회, 연방 상원 등 가주 주요 공직의 거의 전부를 민주당이 독식하게 하는 데 가장 큰공을 세운 인물은 피트 윌슨 전 가주 지사이다.
1994년 경기불황으로 인기가 급락, 재선이 어렵게 된 피트 윌슨 지사는 백인 중산층의 몰 표를 얻기 위한 전략으로 불법 체류자의 사회복지 혜택을 박탈하는 프로포지션 187을 들고 나왔다. 멕시칸들이 국경을 막은 담을 넘어 가주로 몰려드는 TV 광고를 내보내며 반 이민 정서를 불러일으킨 그는 그 덕에 겨우 재선에는 성공했지만 해가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히스패닉과 아시안 유권자들이 공화당에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지금 윌슨은 당내에서도 기피 인물로 찍혀 각종 행사장에 얼굴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그 이후로 가주 공화당은 ‘반 이민의 선봉에 선 보수 반동집단’이란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이번 예선에서 패배한 리오단은 지고 난 후에도 "가주 공화당은 여성과 소수계를 껴안아야 한다. 이 점을 강조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캠페인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 신인인 사이먼이 이민과 소수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가주에서는 소수계와 이민자가 더 이상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 가주의 민주당 일당 독재가 계속될 경우 공화당의 장래는 어둡다.
누누이 나온 얘기지만 미국은 이민자가 세운 나라다. 미국이 지닌 힘과 활력의 상당 부분은 ‘잘 살아보겠다’는 신참 이민자의 피와 땀의 결실이다.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이면서도 히스패닉을 포용, 압도적인 표 차로 텍사스 주지사에 재선됐으며 그것이 백악관 입성의 발판이 됐다. 올 11월 본선에서 나라로 따져도 7번째 규모인 가주 지사 자리를 놓고 데이비스와 한판 붙게 될 사이먼이 윌슨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부시의 뒤를 따를 것인지 한인 커뮤니티는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