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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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망 피하는 ‘편법거래’ 도려내자

2002-02-2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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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멘터리21-한인은행 위법적발 문제

▶ 박봉현 편집위원

’커뮤니티 금고’인 한인은행은 8개다. 6월께 하나가 추가되고 빠르면 연내 하나가 더 생길 예정이다. 무대는 좁은데 마이크를 잡으려는 사람이 많은 격이다. 지나친 경쟁이 위법을 초래했고 당국의 된서리를 맞았다. 지난 연말 현재 한인은행의 규모는 총자산 40억달러, 예금 36억달러, 대출 30억달러. 이젠 외적 성장에 걸맞게 내실 있는 준법경영에 눈 돌릴 때다.


한인타운에 사는 K씨는 올해 초 LA 인근의 먼 친척으로부터 1만5,000달러를 현금으로 받았다. K씨는 "1만달러가 넘으면 연방국세청에 보고되므로 나눠서 입금해 달라"는 부탁에 자초지종을 캐묻지 않고 자신이 거래하는 은행의 체킹구좌에 입금했다. 나중에 직장 동료와 이 사안에 대해 거론한 K씨는 자신의 행동이 탈세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돈세탁에 포함된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고 했다.

평소 입금수준으로 볼 때 분명 이례적인 액수였지만 은행측도 아무 소리하지 않고 돈을 받아주었다고 했다. 1만달러 미만이라도 의심스런 현금분할 입금에 대해 고객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혐의거래 보고’(Suspicious Activity Report) 규정이 9·11 테러사건 이후 강화됐음에도 일부 은행에선 구시대 관행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인은행들이 규정위반으로 감독 당국에 적발돼 시정명령을 받거나 벌금을 부과 받은 것도 이처럼 잘못된 관행을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은행의 불투명한 현금거래는 과당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시장은 좁은데 은행은 늘어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슬쩍 눈감기’가 다반사가 된 것이다.

한인은행들이 지난해 11월이래 줄줄이 적발된 것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것은 아니다. 한국으로부터의 송금을 은행 직원의 구좌로 분산 입금하거나 세금보고하지 않은 현금을 맡아 탈세를 조장한 혐의 등으로 지금도 조사를 받고 있는 은행이 있다고 하니 파장은 쉽게 가라않을 것 같지 않다.

"한인은행의 현금 거래량이 미국은행의 10배 정도"라는 한 은행장의 추산만 보아도 한인은행은 ‘주요 감시대상’에 오를 만하다. 감독 당국자들간에는 "한인이나 중국계 은행을 조사하면 반드시 위법행위가 나온다" "이들 은행을 조사하고도 부정행위를 찾아내지 못하면 바보"라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한다.

저간의 사정이 이렇다보니 큰손들이 한인은행에 돈을 넣어두기를 꺼린다고 한다. "한국 대선을 앞두고 이런 저런 이유로 미국으로 거액을 옮기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한인은행에 맡기면 조사 받을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아예 일본계 은행과 거래하는 경우가 있다"는 한 은행 간부의 설명은 일부 한인은행의 왜곡된 현금거래 관행이 어찌됐든 큰손님을 쫓아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투자자유화 조치 이후 한국에서 오는 돈으로 은행들이 숨통을 트고 있다고 하지만 보다 투명한 경영으로 더 많은 고객을 모으려는 쇄신이 아쉬운 시점이다.

자잘한 은행이 많아지면 규모가 줄어들고 대출규모도 따라가게 마련이다. 한 대형교회에 1,000만달러를 대출하거나 두 은행이 공동 대출하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덩치 큰 은행이 없으니 대형 프로젝트의 자금줄을 찾기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란 지적도 있다. 타 커뮤니티와의 경쟁력 측면에서도 그저 넘겨버릴 사안이 아니다.

은행의 수적 증가는 은행원들에겐 반가운 소식이다. 수평이동이 그만큼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니 직업윤리 문제가 부각된다. 감독기관의 시정명령을 받은 은행은 강제규정은 없지만 감독기관 눈치보느라 업무담당자를 해고하는 경우가 있다. "윗분도 다 알고 묵인한 일인데 왜 나만 문책하느냐"는 볼멘소리를 내는 직원도 있고,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전에 사직서를 내고 다른 은행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다.

팽창일로의 은행들로선 ‘인재’가 아쉬우니 타 은행 직원의 ‘입사 노크’에 비교적 관대하다. 그래서 어떤 은행원은 타운 내 여러 은행을 두루 ‘섭렵’하기도 한다. 은행간 스카웃전은 일부 젊은 은행원들간에 "여기서 일하다 문제 생기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는 안이한 사고를 부추긴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엄밀히 따지면 부당한 현금거래 책임은 배짱 튀기는 고객에게도 있다. 1만달러를 국세청에 보고되지 않도록 알아서 처리해 달라면서 "VIP인데 이 정도 편의도 안 봐주느냐. 은행을 바꾸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고객 앞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이란 한국적 정서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은행 관계자의 말도 이해는 된다. 그래도 ‘고객유치’ 목적이 ‘위법’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은행 증설을 무조건 삐딱하게 볼 일은 아니다. 한인사업가 10명 중 4명꼴로 한인은행에서 사업자금을 대출 받았으며, 타 커뮤니티보다 자체 은행을 선호하는 이유로 문화적 이해와 은행 수 증가 등을 꼽았다는 메릴린치 증권사의 설문조사 결과는 한인은행의 기여도를 입증하고 있다. 또 은행이 늘면서 서비스가 좋아지고 문턱이 낮아진 점도 들 수 있다. 아울러 현재 8개 은행에서 1,000여명이 일하고 있으니 고용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은행의 수적 증가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양립한다. 그렇다면 좋은 점은 확대 재생산하고 나쁜 점은 고사시키는 경영, 즉 법을 어기는 ‘분리 입금’이 아니라 준법과 편법을 두부 가르듯 떼어놓는 ‘분리 경영’이 강조돼야 한다. 정부가 9·11 이후 테러자금 조사를 위해 지난해 10월 ‘애국법’(Patriot Act)을 제정, 기존의 ‘현금 및 외국과의 거래보고에 대한 규정’(Bank Secrecy Act)을 대폭 강화했음을 숙지하고 ‘원칙대로’ 해야 할 것이다. 성장일변도 경영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내실과 성장의 균형을 꾀할 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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