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악마와 ‘악의 축’

2002-02-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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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시각

▶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뉴욕타임스 칼럼

지난주 부시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길엔 ‘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백악관이 ‘악의 축’ 발언의 불씨를 끄려 조심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부시는 자신의 내심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부시가 옳았다. 북한은 너무 사악해 역설적으로 스탈린도 부러워했을 것이다. 진정, 아시아 순방동안 부시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진짜 문제는 부시의 솔직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대 북한정책이 전혀 없다는 데 있다.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대사가 지적한 대로 ‘비난정책’ 외엔 뚜렷한 정책이 수립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악’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음으로써 위험한 현실이 가려지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올 가을께 엄청난 전쟁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도 이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94년 이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시켜 온 제네바협약의 틀이 와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협약은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의 전력난 해소를 위해 경수로 핵발전소를 건설해 준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측의 상호 의혹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 협약은 거의 사문화됐다. 협약은 상호비방 속에 유명무실해질 것이고 북한 지도자들은 그들의 핵 프로그램을 다시 가동할 것이다. 우리가 강력히 만류해도 북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조지아대 한인 정치학자는 "경수로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북한이 믿는 순간 북한은 대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비공식 대변인인 김명철도 올 하반기에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핵 협상이 깨지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실험을 재개할 것이란 얘기다. 김명철은 "미국이 군사행동을 감행하면 북한은 한국과 일본을 미사일로 강타하고 핵탄두도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북한은 소형 탄두를 알래스카까지는 발사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김명철은 "북한 주민들은 미국과 핵전쟁을 최초로 치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이 물러설 것을 확신한다는 태도로 여유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북한이 헤비급 챔피언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불구로 만들어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이것이 북한의 전략이다"

물론 이같은 북한의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호전적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위기상황을 피하기 위한 다양한 외교전략이 긴요하다. ‘악의 축’이니 무어니 하는 지칭보다는 실질적인 정책이 시급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북한과의 대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난 72년 공화당 소속의 닉슨 대통령이 공산국가 중국과 고위급 회담을 장려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같은 정책은 북한 길들이기에 효과를 낼 것이다.

지난주 부시를 비롯해 행정부 고위관리들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희망의사를 비쳤다. 하지만 북한이 대화에 응하더라도 미국이 말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레이니 대사도 "우리가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이 대화할 거리가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제 북한을 고립시키려는 우리의 전략은 김정일로 하여금 국제사회에서 ‘사악한’ 정권을 지원하고 대재앙의 위험을 증가시키게 할 뿐이다. 결국 이것이 무절제한 ‘악의 축’ 발언보다 훨씬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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