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을 방문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수많은 교민들의 성원을 확인하고 매우 흡족했다고 한다. 들리는 곳마다 손이라도 잡아보려는 후원자들로 북적댔다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짐작된다. 지난 설날에도 이 총재는 흐뭇한 하루를 보냈다. 서울 가회동에 있는 이 총재의 빌라로 1천 여명의 하객들이 줄줄이 찾아가 세배를 했다니 세상이 이젠 내편이라는 느긋함을 느꼈을 법도 하다. 주변에 이렇듯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 하다. 다음 대권을 움켜 쥘 가능성이 큰 그로부터 ‘눈 도장’이라도 받아 두어야 한자리 할 게 아니냐고 계산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방문의 경우는 먼 조국 땅에서 온 야당 지도자를 따듯이 맞이하는 게 예의라는 순수한 생각에서 이 총재 행사에 참석한 동포들이 대부분이었으리라 믿고싶다. 하지만 동포 사회인들 차기 정권에 줄을 서려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YS에서 DJ로 다시 HC(?)로 문패를 바꿔 단 이는 또 없을까?
나는 순수한 마음에서 지지를 표시하는 이들을 나무랄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 혹은 대권 주자를 위해 인사와 격려를 하고 더 나아가 헌금도 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오히려 떳떳한 참정권 행사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또 미래에도 그럴 게 분명한, 권력과 ‘예비권력’ 주변에 몰려드는 출세 지향의 인물들을 나는 경계하고 비난할 뿐이다. 권력에 줄을 선 자들은 필연코 ‘지원과 충성’의 대가로 권력의 파이라는 반대급부를 노릴 게 틀림없음으로.
이른바 ‘선거 공신(功臣)’에 대한 보상은 정당 정치에선 불가피한 일이다. 미국도 새 집권자가 들어서면 선거 참모들을 연방정부 내 3천여개의 요직에 앉힌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직(政治職·Political Appointee) 임명에 원칙도, 금도(襟度)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런 병폐는 DJ 정권 하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선생님(DJ)을 위해 배를 골아가며 몸과 마음을 바친 가신(家臣)과 ‘식객(食客)군단’이 줄줄이 정부 요직과 산하기관의 중역자리에 진군했다. 그들이 자리에 걸 맞는 능력과 자격을 구비했다면 문제될 게 무엇인가. 하지만 그들이 쓴 모자가 너무 컸던 것이다. 최근 줄줄이 터져 나오는 권력층 부패도 따지고 보면 자격 미달의 인물들이 요직에 대거 들어앉아 꿀물을 겁 없이 빨아 삼킨 결과이다.
나는 이 총재 주변에 몰려드는 출세 지향적 면면들을 보면서 다음 정권에서도 그런 병폐는 좀처럼 사라지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총재든 또 다른 이든 누가 정권을 잡아도 승전 뒤에 전리품을 놓고 벌어질 감투 쟁탈전은 여전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글쎄, 40년 야당에다 JP와도 갈라 먹어야했던 DJ정권에 비하면 다음 정권은 조금 나아지려나?
이 문제는 이 총재의 대선 전략과도 무관치 않다.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그만큼 집권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만 역풍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지금 이 총재는 집권을 장담할 만큼 절대 우위에 있지 않다. 민주당 후보조차 되지 않은 이인제씨로부터 바짝 추격을 받고 있다. 그가 당 후보로 확정돼 바람을 일으킬 경우 예상 밖의 파괴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높다. 더욱이 한나라당 내의 영남 및 비주류 세력과 밀실 정치의 고수인 JP 그리고 호남의 막판 합종연횡이 가시화 돼 반이회창 군단이라도 형성된다면 그의 당선 가능성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주변 분위기는 대권이 손안에 들어 온 듯 느긋한 표정들이다. 얼마 전 이 총재가 참석한 K교 동문 모임에선 "이회창"을 연호하며 이번에야말로 명문 K고의 위력을 과시하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소리가 전해질수록 그에겐 득 될 게 없다. "K교?, 뭐 S대? 잘 들 해 보라지--"하는 반감이 왜 안 일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이 총재에겐 "속이 너무 좁다"느니, "큰 정치를 못한다"느니 하는 비판이 따르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라고 모두 반이회창은 물론 아니다."뾰족한 대안이 없으니--"하고 이내 한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총재는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엄격한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좀 더 마음을 열고 훈훈한 인긴미를 보여주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더 중요한 것은 밥이 다 된 양 수저부터 챙긴다는 소리를 들었다가는 밥솥마저 잃을지 모른다. 그리고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지지자들에 대해서도 옥석을 가리는 밝은 눈을 가져야한다. "내게 집권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줄서기’했다해서 중용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런 공약이라도 내 놓아야 DJ정권의 전철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