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생님의 방에서

2002-02-11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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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칼럼-세상사는 이야기

▶ 고경호 <화가>

한국에서 대학 입학을 눈앞에 두고 이민 온 이듬해, 원서접수만으로도 입학이 가능한 것이 신기한 채 LA시립대학(LACC)에 등록을 하였다. 한 학기에 50불이라는 저렴한 학비혜택을 위하여 1년동안 일을 하며 기다리던 대학생활의 시작이었다.

영어로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여 긴장을 하고 앉아있던 첫 학기 첫 수업은 기초 드로잉반. 교수님은 일본인 2세 히가 선생님이셨다.

엄격하셨지만 정확한 설명과 시범으로 영어가 서툰 학생들도 열심을 내게 해주셨던 선생님은 학기 중간쯤에는 집으로 우리들을 초대하여 BBQ를 해주시며 형편이 어렵더라도 학업을 포기하지 말라고, 미래는 지금하기 나름이라며 격려를 해주셨다.


어느날 모 미대에서 학생모집차 나와 보여준 화면속에서 밝은 얼굴로 활기차게 그림에 전념하고 있는 그 대학 학생들을 보고는 하루종일 기분이 침울하였다. 아직 편입도 못한 나의 처지와 비교되어 부럽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날 무렵 교수님을 나를 부르셨다. 교수님을 따라 2층 연구실에 가서 앉자 그분은 종이에 연도 수를 쭉 적으시며 쉬운 영어로 내게 설명하셨다.

"나는 말이다, 시립대 2년, 군대 3년에, 결혼하고, 일하고... 총 11년 걸려서 학위를 받고 여기서 가르치게 됐지. 너는 나보다야 빠를걸? 내가 기다릴테니 가르치러 돌아오지 않겠니? 너는 할 수 있을거다" 그때 내가 받았던 위로와 감격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그 후로도 편입학 학교방문때 직접 운전을 하여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오가는 길에 햄버거를 사주시기도 하셨다.

영어반 에세이 검토부터 편입원서까지 뭐든지 들고 가면 봐주시던 선생님. 길고 지루한 준비가 끝나고 UCLA로 옮겨갈 때는 얼마나 기뻐해 주셨는지, 편입후 전화도 드리고 가끔 찾아뵙기는 했지만 마음 같지는 못했다.

몇 년후 대학원 졸업전시 준비로 바쁘던중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안 되어 부음을 접했다. 내 무심함에 울며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사모님은 선생님께서 얼마나 내 전화를 기다리셨는지 말씀해 주셨다. 잘 지내니 연락이 없지, 당신을 자주 찾는다면 내게 어려움이 있다는 말이니 그러면 안된다며 웃으셨다고 한다.

지금 나는 그 분이 가르치시던 내 첫 수업의 교실에서 같은 과목을 가르친다. 그 분 앞에 앉아서 도움을 받던 2층 연구실의 책상은 내가 앉아서 성적을 매기는 책상이 되었다. 수업때도, 내가 만들어 하게된 편입과정 세미나때도, 선생님이 남기신 30여년 동안의 수업자료를 유산으로 물려주신 사모님께 감사하게 된다.

교정을 걸어 교실로 갈 때마다 아직도 나는 총총걸음을 걸으시며 한 손엔 수업자료를 들고 반갑게 손을 흔드시던 나의 은사님을 뵙는다.

지난 월요일에 LACC의 봄학기가 개강했다. 한인타운에 분교도 생긴 LACC에 가슴에 꿈을 품은 많은 젊은이들이 오면 좋겠다. 그 긴장된 얼굴들 속에서 부족하나마 히가선생님의 마음으로 내 젊었던 스무살의 얼굴을 발견하고 싶다.

갈 길은 멀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꿈을 품은 그 얼굴들을 만나면 우리집에 BBQ를 먹으러 오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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