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젊은 언니 안녕

2002-01-29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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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칼럼-세상사는 이야기

▶ 백재욱 <리맥스 100 부동산 대표>

처음 몇 줄을 읽을 땐 엄마에게 온 우편물인 줄 알았다.

관공서에서 엄마에게 보낼 서류들은 우리 집 주소로 배달되게 해놓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그 중의 하난가보다 잠깐 생각한 것이다. 아까 겉봉 뜯을 땐 내 이름이 써있었던 것 같은데...

<...나이 때문에 의료보험 가입을 거부당했거나, 보험료가 급등했다는 통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 000 보험회사는 당신 같은 연령층을 위해 회원제로 운영되며...>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누군들 그런 착각을 하지 않겠는가. 무슨 조사를 보았더니 모든 성인의 86%, 남자의 75%가 ‘나는 실제의 내 나이보다 5~6년은 젊어 보인다’라고 믿고 있다는데.


그래서 "어머머, 전혀 그 나이론 안 보이세요. 아무리 많아야 고작..."이란 말을 들으면 "에이, 우리 막내가 벌써 몇 살인데요" 겉으로는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인색도 하지. 기왕이면 서너살 더 젊게 봐주면 안돼?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냐’ 하는게 공통된 반응이라니, 왜 엄마 편지가 내 이름 앞으로 왔지 하는 착각이 2~3분 더 계속됐다 해서 너무 비웃지 말아주기를.

<...50세 이상의 남녀 누구에게나 본 000 보험회사는 균등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안락한 노년을 즐기도록...>하고 이어지는 문장을 눈으로만 건성 따라 읽다가 불현듯 앞줄로 되돌아가 다시 읽는 순간 "아니 이게 뭐야. 50? 오십이라구? 그럼 이게 지금 나한테 온 편지란 말야?" 마시지도 않은 술이 확 깨는 느낌. 텅 빈 마루엔 아무도 본 사람이 없건만 혼자서조차 부끄러운 이 얼굴은 당황인가, 황당인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더니 한다는 소리라고 "호호호, 우리 집엔 묘지 사두라는 편지도 왔다 얘. 뭘 그걸 갖고 그러니, 깔깔깔" 기막혀라. 너 친구 맞아?

고등학교 동기들끼리 한달에 한번씩 만나는 점심모임이 거진 10년째 돼 가는데, 만날 때마다 우리가 하는 거짓말은 서로서로 "웬 아가씨가 들어오나 했더니 너로구나. 어쩜 그렇게 영계 같으니?"다.

하지만 식사를 주문하기 위해 차림표를 들여다볼 때면 너나없이 팔을 쭉 펴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는 바람에 머리를 맞대고 이루었던 원탁의 작은 동그라미는 활짝 펴진 부채춤의 그것처럼 커다래진다. 어쩔 수 없이 실제의 나이가 들켜지는 순간이다.

오죽하면 한 친구가 자기는 식당가기 전에 미리 주문할 음식을 생각해 두었다가 시키기 때문에 나이든 티를 안 내도 된다는 말에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채택이 되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보험회사의 편지 부치는 사람에게 우리는 단순히 ‘당신같은 연령층’의 가망고객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직 한번도 제대로 살아본 적조차 없는 것 같은데. 언젠가 진짜로 살기 위해서, 이제까지 그 준비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내 마음속의 나이야 핑클이든 김하늘이든 상관없이, 정초에 받은 편지는 내 나이가 객관적으로 어떻게 매겨지고 있나를 새삼 생각해보게 하는 노년으로의 초대장이었다.
젊게 보이는(look young)게 아니고 근사해 보이는(look great) 것, 옷 사이즈 0 이나 2의 수퍼모델(super model)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의 닮고 싶은 표본(role model)이 되어야할 나이가 되었구나 싶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만큼 인생이 긴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할 만큼 짧은 것도 아니라고 마음속에 가만히 한 금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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