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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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연두회견 유감

2002-01-2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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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1월 14일에 열린 김대중 대통령(DJ)의 연두기자회견은 많은 국민들에게 이런저런 상념을 던졌을 것이다. 실로 김 대통령은 오랜만에 국민 앞에 나타나 장시간 이야기를 했다. 기자회견으로는 꼭 1년여만의 행사다. 취임 초 분기마다 ‘국민과의 대화’를 갖겠다더니 왜 그처럼 오랜만에 국민들 앞에 서게됐는지 의아스럽고 유감스럽다는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느낌도 없지 않았을 듯하다. "우리 대통령이 어쩌다 저렇게 연로해지셨는가"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국민들 가슴을 엄습했을 성 싶다. 70세 중반에 권력 정상을 잡았지만 대통령에 취임 한 98년 때만 해도 목소리는 힘이 배여 있었고 유머 감각도 반짝였다. 한데 집권 4년을 보내고 8순에 접어든 2002년 1월, 국민 앞에 나타난 DJ의 모습은 크게 변해 있었다. 목소리의 볼륨은 현저히 떨어졌고 언어 구사력도 전만 크게 못했다. 까다로운 발음 표현이 부자유스러울 정도였다.

벤처비리 등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 문제에 대한 답변 도중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 할 때는 목소리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갈라지고 곤혹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상처 입은 자존과 그에 따른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TV 생방송에 맞춰 흔히 가다듬는 메이크업(분장)의 효과도 없이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였고 볼의 근육도 처져있었다. 켜켜이 쌓인 난제의 무게에 두 어깨는 더할 나위 없이 피곤해 보였다.


DJ의 외형적 건강이 걱정스러울 정도가 된 데는 난마처럼 얽힌 국정으로 심신이 고된 때문일 것으로 믿어진다. 물론 대통령의 자연적 연령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장년들에게도 버거운 국사를 8순의 노인이 헤쳐나간다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런 때문에 최근 세계 여러 나라의 통수권자 연령이 50대 이하로 하향하고 있음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의 건강문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때 우리 유권자들이 후보군의 건강 문제를 좀 더 엄격하게 검증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김대중 후보의 나이와 건강 문제가 정치적 논란이 되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DJ진영은 노심초사했다.

국가 의료기관인 서울대병원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 후보를 공동 검증하자는 상대당 제의는 거절당했다. 그 대신 사립대 병원의 의사진을 임의로 선정해 건강 진단서를 공표하는 것으로써 예봉을 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국민들에게는 좀 더 공신력 있고 권위 있는 건강 명세표가 제시됐어야 했다. 공평한 점검 리스트 아래 공동으로 진행된 건강검증이어야 신뢰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국민이나 언론 어느 쪽에서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정세와 난마처럼 얽힌 국내문제를 선두에서 헤쳐나가는 대통령이 늙고 거동이 불편하거나 몸이 쇠약한 상태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통치력이 태반 무력해 지기 때문이다.

한편 DJ의 기자회견은 저널리즘적 시각에서 볼 때에도 유감천만이 아닐 수 없었다. 기자회견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함량 미달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동안에는 많은 문제들이 터졌다. 부정부패, 지역감정, 편중인사, 언론 탄압, 대북 과속접근 등등. 부패문제만 해도 여러 세부 질문이 제기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 연루문제, 아태재단 헌금문제, DJ자신의 과거 정치자금 문제---이런 것들에 대한 질문은 아예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대통령의 포괄적 답변에 대한 추가질문도 전무했다. 대통령의 건강을 걱정해 까다로운 질문은 기자들 스스로 삼간 것인가. 아니면 청와대와 기자단간의 암묵 때문인가. 과거에는 그런 암묵하의 회견이 판을 쳤다. 준비된 질문에 준비된 답변을 하는 쇼적 회견이 전부였다.

DJ정권 출범과 더불어 자율과 자유와 책임이 동반된 ‘신 언론 문화’를 당국도 언론도 함께 외쳐온 것은 한낱 허언이었단 말인가. 언론계 세무조사라는 철퇴를 맞고 사주가 쇠고랑을 차는 치욕을 겪고도 언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가. 힘겨워하는 노(老) 대통령의 건강을 생각해서 연한 질문만 한 것이라면 일응 동정이 간다. 하지만 아픈 질문을 던질 용기가 없어 주눅든 짓을 했다면 한국 언론은 아직 멀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백악관 기자회견이었다면 대통령과 그 가족을 둘러 싼 각종 비리설에 대해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됐겠는가. 목하 엔론 게이트를 놓고 끈질기게 달려드는 미국언론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는가. 이래저래 2002년 대통령 연두회견은 국민들에게 한탄과 유감만 안겨 준 행사였다. 한시간이 넘도록 회견을 지켜 본 국민들의 가슴속엔 서글픈 감정의 찌꺼기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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