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기 기억 상실증

2002-01-24 (목)
크게 작게

▶ 크리스 포먼 칼럼

2002년 새해를 맞이하며 결심한 것 중에 하나는 나 자신을 좀더 잘 돌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새해 다짐을 성실하게 지키기 위하여 나는 동네 월그린 약방에 가서 여러 가지 종류의 비타민을 샀다. 하루에 한 알씩 먹는 종합 비타민, 비타민 B, 마그네슘, 철분, 칼슘, 비타민 D 등을 샀다. 여러 종류의 비타민을 기억하고 먹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플래스틱 비타민 케이스도 잊지 않고 샀다.

기억력에 좋다는 은행으로 만든 약이 눈에 띄었다. "단기 기억력을 촉진시켜주고 두뇌의 민첩한 활동을 도와준다"라고 약병에 써있는 대로 효력을 발휘한다면 내가 산 약들 중에 아마 가장 중요한 약일지도 모른다 싶어 은행 약을 샀다. 나의 기억력을 도와주는 약이 없이는 분명 나는 비타민 먹는 것을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건망증은 우리 식구들이 앓고 있는 병이다. 나는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쯤을 지갑을 찾기 위해, 자동차 열쇠나 안경을 찾기 위해 소비한다. 똑같은 장소에 잘 놓는다고 하는데, 잘 보관 해둔 그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내가 결혼한 여자도 단기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나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결혼 전에 데이트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는데 그녀는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었던 첫 선물은 비싼 가죽 장갑이었다. 그런데 다음 번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또 다시 장갑을 끼지 않고 있었다.

손이 차가운데 왜 장갑을 끼지 않고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만나러 급히 나오면서 택시에 장갑을 두고 내렸다고 하였다. 그 전 것보다 약간 싼 장갑을 사서 그녀에게 주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말까 하는데 그녀는 장갑을 또 잃어버렸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첫 번째 장갑을 샀던 가게에 가서 똑 같은 장갑을 사서 택시에서 두고 내린 장갑을 찾았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장갑을 다시 주었다.

지금도 우리는 가끔 장갑 이야기를 하면서 웃는다. 지금이나 그때나 아내는 건망증이 심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아내는 내가 잘못한 일은 20년 전에 있었던 일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신기하다.

큰아들 제커리 역시 우리를 닮아 단기 기억력 문제가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기억하면서도 조금 전에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은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쩔쩔 맨다. 건망증이 심한 아들에게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머리가 몸에 붙여 있지 않다면 머리를 잃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제커리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학기가 끝난 마지막 날 학교 카페테리아에 아이들이 놓고 간 물건을 부모들이 찾아가도록 전시해 놓았는데, 제커리가 잃어버린 물건들이 거기에 모두 있었다. 런치 박스가 3개, 스웨터 5개, 모자가 3개. 우리를 닮아 건망증이 심한 아이를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그의 건망증에 관계치 않는다. 왜냐하면 아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아들은 집에 방문할 때마다 소지품 무엇인가를 빠뜨리고 간다. 자기 물건을 되찾기 위해 집을 다시 방문하거나 우리가 그의 물건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올해의 첫 달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비타민을 먹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딱 한번 잊은 적이 있다. 주말 여행 중 호텔 방에 비타민을 담아둔 케이스를 두고 왔다.

비타민 케이스를 다시 사기 위해 약방에 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자동차 열쇠와 지갑을 어디에 두었더라. 은행의 신통한 효력이 아마 2003년쯤에는 발휘하겠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