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신도 늙는다

2002-01-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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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현 편집위원

노인에 대한 극단적인 불경과 지극 정성의 깨달음을 동시에 던지는 사례로 ‘고려장’을 둘러싼 설화를 들 수 있다.

민간설화인 ‘기로전설’에는 할아버지-아들-손자 3대의 얘기가 나온다. 아들은 70세가 된 아버지를 지게에 태운 채 풍습대로 인적이 없는 깊은 산중에 버리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함께 간 어린 아들이 지게를 다시 가져오려 했다.

영문을 모른 이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나중에 아버지가 늙어 산에 갖다 버릴 때 이 지게가 필요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말에 감화돼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와 오랫동안 봉양했다고 한다.


중국의 ‘효자전’에 등장하는 한 효자는 차마 노부모를 내다버릴 수 없어 집에서 그냥 모셨다. 하루는 중국에서 고려에 중요한 문제를 내고, 해답을 구하지 못하면 엄청난 화를 부를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아무도 답을 찾지 못해 온 나라가 근심에 쌓였었는데 마침 이 효자의 노부모가 정답을 알려주어 나라가 곤궁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친부모이건 남의 부모이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노인을 함부로 대해선 안된다"는 폐부를 찌르는 교훈을 담고 있다. 노인을 모실 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도리임을 감안하면, 최근 밝혀진 대로 일부 양로병원이 노인을 ‘용도 폐기된 물건’ 취급한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내 부모도 아닌데…"한다면 엇나간 생각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친부모를 모시지 못해 양로병원에 맡겼으면 그때부터 노인 모시기는 병원측의 몫이다. 남의 부모라고 대충 돌보는 사람은 십중팔구 자기 부모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기 때문이다. 친부모에 극진한 사람은 남의 부모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법이다. 게다가 한인사회와 같은 작은 커뮤니티에서는 몇 다리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

물론 양로병원도 일종의 비즈니스이니 수지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노인학대’로 정부기관으로부터 처벌을 받아 벌금을 내다보면 밑지는 장사가 될 수도 있다. 일부 양로병원은 노인들의 요구를 제때 들어주었으면 적은 비용을 들여 인심도 얻었을 텐데, 관리소홀과 학대로 LA카운티 보건국에 1만달러가 넘는 벌금을 내고 욕까지 먹었으니 ‘소탐대실’의 경구만 되새겨준 꼴이다.

병원의 노인들은 말수가 적다. 치매를 앓는 등 병이 들어 더욱 그렇다. 정부 보조금을 관리하지 못해 병원측에 불만이 있어도 ‘벙어리’처럼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병원에 기거하는 노인들은 ‘6.25’ 전란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고 가족과 헤어져 가슴에 한을 묻은 채 참고 사는 분들이 상당수다. 이들에게 양로병원의 부당한 처사까지 감내하라는 것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부당 대우를 참지 못해 당국에 고발이라도 하면 ‘배신자’로 찍혀 병원에서 추방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중범죄를 저지른 불법체류자도 아닌데 같은 한인끼리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모기소리처럼 작아지는 게 현실이란다.

노인들이 한인사회에 끼친 공을 생각해서라도 이럴 수는 없다. 낮선 땅에서 맨손으로 피땀 흘려가며 초기 이민사회를 일궈온 장본인들이 바로 지금의 노인이다. 그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인사회도, 양로병원도 자리를 잡을 수 없었을 게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어린 자녀를 돌봐주는 베이비 시터로서, 우리말에 서툰 1.5세 2세들에겐 한국어 가정교사로서, 차편이 없거나 시간이 없는 자녀에겐 손주들 픽업맨으로서 맹렬히 뛴 분들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양로병원이라도 이를 무시하고 노인들을 푸대접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힘센 사람 앞에선 머리를 조아리다가 뒤돌아 약한 사람에게는 호통치며 함부로 대하는 비뚤어진 처세가 양로병원에도 스며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지금이라도 병원측은 노인들의 병약해진 몸이 점점 차가워져도 마음만은 온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따스함으로 돌봐야 할 것이다. 당신들도 곧 늙는다는 섭리를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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