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밸런타인이 되어 주세요
2001-02-10 (토)
새로운 달과 만나려고 달력을 살짝 들춰보던 내게 수줍음을 떨치고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낸 2월이다. 묵묵히 몸을 숨긴 1월에게 야박하다고 눈을 흘겨주곤 금방 2월과 포옹한다. 빨간색 하트모양이 화살에 꿰 뚫린채 아기천사 손에 들려있다. 발가벗은 아기천사 궁둥이가 유난히 포동하다. 얼굴 가득히 행복이 맴돈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기억이 있다. 여름에 한국을 떠나 이민길에 올랐던 나는 그 이듬해 2월에 찾아온 밸런타인스 데이를 아무 지식없이 상면했다.
그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일본계 은행은 아침부터 어수선했다. 출근해보니 책상위에 웬 초컬릿이 빨간 겉옷을 입고 앉아있었다. 다른 책상을 돌아보니 듬성듬성 똑같은 초컬릿이 보인다. 이미 출근한 사람들은 벌써 먹어버린 모양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우선은 일을 시작했다. 눈치로 살아온 반만년 역사의 후예답게 말없이 일은 하고 있지만 신경은 온통 초컬릿의 정체를 파악하기에 곤두서 있었다.
“해피 밸런타인스데이, 기제”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드니 동료 유미상이다. 아주 커다란 초컬릿 상자를 들이민다. 모양이 다 다른 것이 하나만 고르기엔 무리인듯 싶어 두개를 집고 웃어줬다. 도무지 무슨 날인지 감이 안잡히니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나 계속 고민하기로 했다. 뭐 사랑하고 관계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오전근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사람의 물결, 차의 물결이 뻐근하게 포만감을 주는 윌셔와 6가의 다운타운이다. 유난스레 빨간색의 장식이 넘치는 가게로 빨려 들어갔다. 바글바글 사람이 들끓고 있다. 정신 없이 바빠 보이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하트모양을 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바로 카운터 옆에 수북이 쌓인 초컬릿 상자를 내어준다. 그렇지 바로 이거다. 빨간색으로만 포장된 초컬릿보다는 이왕이면 확실하게 사랑을 표시하는 이것으로 남보다 좀 다르게 표현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감동을 받는 기색도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보다는 내가 거금을 들여 나눠준 하트모양의 초컬릿이 훨씬 이날을 잘 나타내는 것 같은데, 어쩜 꿀 먹은 벙어리들이람. 사무실에 가득찬 일본사람들이 새삼 멋없어 보였다. 일본인 일색에 단 하나 외국인인 내가 제일 분위기에 맞게 사는 위트 있는 사람 아니냐고 고개를 바짝 들었던 기억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똑같은 이름의 날들이지만 그때마다 내게 느껴지는 기분은 다르다. 이번 밸런타인스 데이에는 하트모양의 초컬릿을 한 트럭쯤 싣고 거리거리 외진 곳마다, 양로원 침실 침실마다, 어느 곳이든 소외된 가슴들을 찾아내어 나의 뜨거운 마음이 담긴 하트모양의 초컬릿과 함께 “나의 밸런타인이 되어 주세요”를 수줍게 말하고 싶다.
포동포동 발가벗은 아기천사와 함께라면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가슴이 따스해지지 않을까? 큐피드의 화살만이 오늘 쓰여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 화살 없는 사랑이라도 필요한 사람들이 오늘 밸런타인스 데이에는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