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준비를 하라
2001-02-09 (금)
▶ 뉴스 에세이
▶ 조윤성(부국장, 국제부 부장)
정치인들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일은 잊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스캔들을 만들어 낸다는 냉소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한국의 어떤 전직처럼 권력의 정점에 섰다가 내려온 사람들이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수준 이하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바로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출로 보면 정확하다.
그만큼 자리에는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나게 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금단증세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북적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해 보라. 오랜만에 갖게 된 한적함이 그에게는 휴식이 아니라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면 시원하기는 해도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과 같다.
손발이 다 편해졌는데도 오히려 사지가 꽁꽁 묶인 듯한 무력감을 맛보게 하는 게 자리를 떠남의 역설이다. 그 무력감은 높은 곳에 있다가 기후와 생태가 전혀 다른 낮은 곳으로 내려온 사람일수록 더욱 심하다.
백악관을 떠나 민간인 신분으로 뉴욕에 새 둥지를 마련한 클린턴은 이런 금단증세를 유독 심하게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모처럼 마음껏 늦잠 잘 수 있고 신문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없게 된 생활이 그에게는 편치만은 않은 것 같다. 클린턴은 젊고 대단히 권력 지향적인 성격이다. 그래서일까. 퇴임 전부터 측근을 전국 민주당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하는 등 향후 영향력을 의식한 듯한 조치를 취해온 그는 백악관을 나오자마자 맨해턴에 넓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곧바로 유료 연설에 나서고 있다. 구설수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주위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얼마나 무심할 수 있는가 정말 놀라울 정도"라며 "이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 없다"고 털어놨다. 8년간을 권력자로서 톱니바퀴 돌아가듯 한치의 오차도 없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던 사람이 갑자기 잠잘 시간이 많아졌다고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게 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자리는 많은 것에 익숙하게 만든다. 클린턴은 자신이 현재 ‘과도기적 치유과정’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그의 지적대로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오랜 치유가 필요할 만큼 힘든 일이다.
이런 금단증세를 최소화하려면 자리에 있을 때부터 잊혀질 준비를 해야 한다. 마치 아기가 젖을 떼는 이유기를 거치듯이 자기 스스로와 자리간에 거리를 두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자리가 곧 나"라는 생각은 결국 괴로움만 안겨줄 뿐이다.
어찌 대통령 자리만 그러하겠는가. 모든 사회 조직이 다 그렇다. 한인교회들이 종종 원로목사와 담임목사간의 갈등으로 내홍을 겪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기업들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에서 전직들이 잊혀질 준비가 돼 있으면 조직이 편해지고 대통령이 그러하다면 국가가 조용해진다. 그리고 잊혀질 각오가 돼 있으면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평안해진다. 지난 6일 90회 생일을 맞은 레이건은 지난 89년 퇴임 후 대중들 앞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치매로 그의 기억력은 없어졌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으며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뜨거운 애정을 보내고 있다. 기억될 것은 기억되는 법이다.
남들에게 잊혀지는 것은 노화와 같다.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사는 일이 한결 편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