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말 오염시키는 방송은 곤란"

2001-02-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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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방송인협회 김봉구 회장

김봉구씨는 지난1956년 개국한 한국최초의 TV방송국 HLKZ 아나운서 공채 1기로 방송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67년 도미한뒤 KBC, 기독교 세계방송등에서 일했으며 1972년 미주한국어 TV방송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다. 1977년 재미방송인협회를 발족시켰고 남가주한인사회 최고의 미의제전 남가주미스코리아선발대회 심사위원장으로 활약했다. 20여년만에 재미방송인협회 회장을 다시 맡은 그를 만나 미주한인방송계 현실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초창기 미주한인 방송계는 열악한 환경속에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당시 방송계 여건과 프로그램등에 대해서 기억나는대로 들려달라.


▲내가 67년11월 미국에 왔을 때는 우리말 라디오 방송은 있었지만 우리말 TV 방송은 없었다. 당시에는 방송시간을 얻기가 힘들었다. 이순재, 서정자씨가 주말에 1시간씩 방송되는 한국어 라디오방송을 운영했는데 68년부터 내가 뉴스를 맡았다. 당시 프로그램은 음악이 주류를 이뤘고 뉴스가 가미되는 정도였다. 뉴스를 준비하는데 소스가 없어서 애를 많이 먹었다. 기자도 따로 없었고 요금이 비싸 지금처럼 국제전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실정도 못됐다. 1969년 한국일보가 창간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TV는 1972년 배함덕씨가 설립한 미주한국어 TV방송이 처음이었다. 내가 방송위원을 맡아 실무를 담당했다.

-처음 어떤 계기로 방송인이 되었나.

▲1956년 5월16일 개국한 한국최초의 TV방송국 HLKZ에 공채 아나운서로 들어갔다. 당시 라디오 아나운서 선배들은 있었지만 TV아나운서로는 내가 한국 1호였던 셈이다. 61년12월말 KBS-TV가 개국한뒤 KBS에서도 TV그랜드쇼, 홈런퀴즈등 사회를 맡았다. 민간방송인 KLKZ는 개국 1년후 한국일보 고 장기영사주가 인수해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했으나 3년만에 불이 난뒤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의 미주한인방송과 요즘의 방송을 비교한다면 달라진 점이 많을텐데…

▲미주 한인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한인방송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초창기에는 방송시간 30분도 얻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24시간 라디오방송이 2개나 생겼고, 프라임타임에 방송되는 TV도 2개사가 있다. 한인소유 채널까지 생겼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인방송이 커뮤니티에서 맡아야할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이민생활의 길잡이 노릇을 하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고 매스미디어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등 다중적인 역할을 긍정적으로 해왔다고 본다. 그러나 방송하는 이들이 우리말을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좀더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방송인이 표준발음,옳은 발음을 사용해야지, 표준에서 벗어난 말들을 사용하면 안된다. 우리말을 아끼고 닦아야할 책임이 방송인들에게 있다. 우리말 오염 주범이 방송이라는 비난을 들아서는 결코 안된다.
수습기간을 거쳐 훈련받은 방송인이 마이크를 잡아야하는데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보니 때로 채 훈련이 안된 사람에게 마이크를 맡기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 같다.

-현재 한인방송에서 흔히 빚어지는 오류의 예를 든다면…

▲음의 장단과 강약은 방송인의 금과옥조다. ‘효과’나 ‘불법’을 ‘효꽈’, ‘불뻡’이라고 된소리로 발음해서는 안된다. 호평의 경우 호-평이라고 길게 발음해야 하는데 짧게하면 ‘혹평’으로 들릴 수 있다. ‘무장공비’를 짧게 발음하면 ‘무장을 한 공비’가 아니라 ‘장비가 없는 공비’가 되버린다. 외래어 발음도 한국말 방송에서는 나라에서 정한 외래어 표기법에 의거해 발음해야 한다. ‘모터사이클’이지 ‘모러사이클’이 아니고 ‘밀크’를 ‘미으크’, ‘필름’을 ‘피음’식으로 발음해서는 안된다. 방송에서 쿠사리,만땅꼬등 일본말도 써서는 안되겠다.
수를 셀때도 실수가 많다. ‘네달 후’가 아니고 ‘넉달 후’,시금치 ‘세단’이 아니고 ‘석단’, 사진 ‘한 매’가 아니고 ‘한 장’으로 읽어야 한다. ‘스무여명’ 이라고 읽는 경우도 봤는데 ‘이십여명’ 혹은 ‘스무명 남짓’이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는 기막힌 표현도 봤는데 대단원은 ‘내린다’고 할 때만 쓰는 표현이다. 대통령쯤 죽어야 쓰는 어휘인 ‘서거’를 ‘진 켈리가 서거했다’식으로 남발하는 앵커도 봤으며 "저한테 여쭤봐 주세요"라고 자기를 높이는 여자 방송인도 있었다. 어느 중견 방송인은 득점없이 ‘영패’한 것을 ‘빵패’라고 말했다. 심지어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도 구분 못하는 이도 봤다.
신문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듯이 방송도 표준발음법을 따라야 한다. 방송은 일과성으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알아듣도록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한다.

-방송에서 신문을 자주 인용하다보니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쓰는 경우도 흔히 있다.

▲옳은 지적이다. 한정된 지면의 신문에서는 약어를 많이 쓰는데 이를 방송에서 그대로 읽으면 알아듣기 어렵다. ‘미의회’ ‘미국방부’가 아니라 ‘미국의회’ ‘미국국방부’로 읽어야 한다. 또 미국뉴스를 하면서 한국시간으로 말하는 것을 봤다. 한국신문을 인용한 탓이겠지만 미국시간으로 고쳐서 말해줘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글이나 신문사설을 소개할 때는 ‘했다’체로 읽어주어야 하며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의견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앞과 뒤에 그사실을 밝혀줘야 한다.

-현역 방송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확한 발음을 하기 위해서 우리말 사전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한다. 사전에는 음의 장단이 나와있다. 정확하고 품위있는 말로 정보를 전달하고 문화를 매개하는 방송인이라면 방송에 대한 애착을 갖고 끊임없이 자기연찬을 해야한다. 그래야 발전한다.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말씀했던 주시경선생의 가르침을 기억하자.

<만난사람=박덕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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