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신 못차린 의원님들

2001-01-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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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세이

▶ 권기준 사회부장

80년대 초의 일이다.

서울 근교에서 제법 큰 섬유업체를 운영하는 친지의 사무실에 들렀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중앙에 대통령과 찍은 대문짝만한 사진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대통령이 사인한 감사패가 즐비했다. 사진이 너무 튄다고 했더니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며 저 사진을 걸어놓은 후부터는 소방이니, 환경이니 하며 괴롭히던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해 웃었다.

대통령과 사진을 찍은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그 친지가 당시 여당의 중앙위원이었는데 대통령이 1년에 한번씩 전국의 중앙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 같이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중앙위원의 하는 일은 1년에 한번 중앙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박수 치고 매월 30만원의 회비만 내면 된다. 그 친지가 중앙위원직을 유지하는 목적도 결국 1년에 360만원 내고 대통령과 사진 한장 찍기 위해서였다.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오는 한국 국회의원들의 추태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초청을 받지 못한 일부 의원들은 수천, 수만달러를 주고 입장권 암표를 사고 공화당과 연이 있는 단체나 인사들에게 애걸복걸해 표를 구입해 참석한다고 한다. 현재 취임식 참석을 위해 미국에 와있는 30여명의 국회의원 중 미국측의 초청을 받고 비용을 지원 받은 의원은 5명에 불과하다.


정말 한심하고 딱한 일이다.

의원들이 이같이 많은 돈을 주고 암표까지 구입해 참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0여만명이 모이는 북새통에 ‘의원 외교’가 될 리는 없다. 취임식장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 찍고 파티나 행사장에 참석, 유명 정치인들과 포즈 한번 취하는 목적일 것이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이 사진을 곁들여 유권자들에게 방미활동이라고 소개하고 미 정계 실력자와 친분이 있다고 뽐낸다.

사대주의적 발상이다. 4년전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때도 일부 의원들이 미 정치인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전해져 여론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행사에 참석해 사진 한장 찍는데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된다는 것이다.

미 대통령 취임 축하행사는 취임식과 호텔에서 하는 촛불파티, 만찬 등 3~4개가 있다. 취임식장의 경우 정해진 기부 절차는 없으나 모금함에 통상 500~3,000달러를 기부하는 것이 관례다.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공식적으로 기부금을 내야 입장할 수 있다. 이번에 부시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는 무조건 1인당 2,500달러라고 한다. 보통 한 행사에 1,000명에서 2,000명까지 참석하는데 대통령이 잘 보이는 앞좌석은 1인당 2만5,000달러이다.

부시 대통령은 한 행사장에 5~10분간 머물면서 대부분의 행사장을 돈다. 일부 한국 국회의원들은 부시 대통령이나 유명 정치인들을 만나기 위해 한 사람이 2~3곳의 행사장을 참석한다고 하니 사진 값으로만 최소 1만달러를 쓰게 되는 셈이다.

일부 의원들의 이같은 사대주의적 추태를 생각하니 한국의 중앙위원들이 대통령과 사진을 찍어 걸어놓는 것은 순수하기만 하다.

명심보감 치정편에 ‘이봉이록(爾俸爾祿) 민고민지(民膏民脂)’라는 말이 있다. ‘너의 봉급과 녹이 모두 백성들의 피땀’이라는 뜻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사진을 찍기 위해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수만달러를 쓸 때인가. LA에서 고국 돕기 송금캠페인을 벌이던 때가 바로 엊그제다. 더구나 지금은 임시국회 회기중이다. 공식 초청을 받더라도 거절해야 할 때다. 일부 의원들은 취임식 참석 후 칸쿤 휴가까지 계획했다니 그 배짱이 놀랍기만 하다.

내일 취임식이 열린다.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미 대통령들은 취임사에서 공통적으로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이념과 정당을 떠나 단결하자는 ‘하나의 미국’이요, 둘째는 비싼 대가와 희생을 치르고 얻은 ‘민주주의 수호’요, 셋째는 미국에 대한 ‘신의 축복과 이에 대한 믿음’이다.

많은 선량들이 어려운 때 거액의 돈을 써가며 취임식에 참석했다. 대선 혼란 속에서도 단결을 이루는 진정한 미국의 모습과 민주주의 그리고 신의 뜻을 따르는 겸허한 자세를 배워 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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