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입이 둘 달린 짐승 이야기

2001-01-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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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윤 (수필가)

장자(莊子)에 보면, 회라는 입이 둘 달린 짐승 이야기가 나온다. 먹이가 생기면 두 입이 서로 먼저 먹으려고 싸우는 바람에 아무도 먹지 못해 굶주리며, 서로 물어뜯는 바람에 상처를 입어 결국은 죽게된다는 짐승이다. 두 입이 양보하고 타협하지 못한 결과다.

한인사회가 짧은 이민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의 우수성을 꼽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개인적 근면성과 우수성을 기반으로 이룩된 성과가, 사회적 성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인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부정적 측면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불과 2~30년 전의 이민초기에 비하면 경제규모도 커지고 인구도 늘었다. 초기 이민시대에는 경쟁하는 이웃들이 대체로 타민족이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한정된 업종에 몰린 한인끼리의 경쟁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위에서 예를 든 장자에 나오는 짐승 회 같은 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서로 비난하고 헐뜯고, 남의 성공을 격려해주고 박수 쳐주지는 못하더라도 이웃의 성공을 눈흘기며 깎아 내리려는 사람들로 한인타운은 만원이다.


한국의 유명 언론인 L씨는 유럽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투숙중인 호텔 옆 유대인 경영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그 세탁소 주인은 처음 찾아온 손님에게 정중히 말하기를 "손님, 혹시 길 건너에 있는 세탁소에 갈 것을 잘못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대답을 했더니 잘못 찾아온 손님이 아니란 걸 확인한 다음에야 세탁물을 받더라는 것이다. 비록 길 하나를 마주하고 경쟁할지언정 서로를 지켜주며 사이좋게 장사하는 모습을 보고,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도 저 유대인들처럼 서로 돕고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며 감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 한인들이라면 어땠을까? 이민오기 전에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어느 상가에 한인들하고 유대인들이 들어가면 유대인들은 모여서 사이좋게 어떤 물건은 똑같이 얼마에 팔자고 의논을 해서 모두가 성공적 비즈니스를 하는데, 한인들끼리는 옆집에서 10달러에 팔면 나는 9달러, 내가 9달러에 파니 옆집은 8달러... 이렇게 너 죽고 나 죽자고 가격을 내리다가 결국은 둘 다 망하고 유대인들만 돈을 벌더라는 것이다.

이 한물 간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이민초기에는 한 상가에 한인이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한인끼리 싸울 일이 없었으나 이제는 한인 경쟁자가 넘쳐 나 너도 죽고 나도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노래방이 잘된다고 하니까 1년도 못되어서 한인타운이 온통 노래방으로 변해버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노래방이 생겼다. 그런데 이제 보니 술집이 또 그렇다. 미국 어느 도시엘 가도 LA 한인타운만큼 술집이 많은 곳도 없을 것 같다. 결국은 땀흘려 번 돈을 먹고 마시고 노래하는 유흥에다 쏟고, 돈만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범죄의 온상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비난과 욕설과 모함이 난무하고, 한인타운의 밤은 범죄에 노출된 환락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이것이 지난 세기 한인타운의 자화상이다.

의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 왔다. 비좁은 한인타운에서 한인들끼리 싸울 것이 아니라 넓은 세상을 찾아 나서야할 때다. 20세기가 이데올로기의 시대라면 21세기는 경제가 이데올로기를 대신하는 시대다. 국경이란 지난 세기에나 필요했던 한낱 2차원적 실선에 지나지 않는다. 온 세계가 경제라는 새로운 이상을 향해 이념도, 민족도, 국가도 초월하여 달리고 있다. 21세기에 한인사회가 지금까지의 기반을 바탕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인끼리의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보다 넓은 시장, 주류사회로 접근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틈새에서 이삭만 줍고 있어서는 안된다.

금년에는 또 한인타운에 새로운 한인은행이 탄생할 것이란 소식도 들린다. 그것도 그렇다. 한인타운에 은행이 잘된다니 또 은행을 열겠다고 나서는 것은, 노래방 잘된다고 노래방이 넘쳐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새 은행이 생기면 결국은 기존은행의 고객을 나눠먹는 결과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그들이 전적으로 타민족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거나, 한인고객 가운데 메이저 뱅크를 거래하는 한인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정관이라도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은행장사가 잘되면 잘한다고 손뼉을 쳐주자.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

그리고 또 은행을 만들 돈이 있거든 눈을 밖으로 돌리자. 꼭 은행이 아니더라도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김치 햄버거를 만들어 프랜차이즈를 하고, 우리 고유의 순두부를 미국인들이 즐기게 하고, 미 전국에 불고기 식당 체인을 여는 것도 한인 가운데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돈도 벌고 명예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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