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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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40대 남성들

2001-01-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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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새해 첫주 오래 못본 친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10여년전에는 두 가족이 서로의 집을 내집같이 드나들며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지금은 타주에 살고 있어 가끔 전화나 하는 데 새해벽두 그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유는 묻지말고 돈을 좀 부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송금할 장소는 그의 거주지와 많이 떨어진 엉뚱한 곳이었다.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면 멀리 사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을까”하는 생각에 일단 돈을 부치고 그 부인에게 전화를 해 사정을 알아보았다. 부인의 말로는 남편이 집에 안들어온지 여러 날이 되었고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돈을 보내달라던 도시에 카지노가 많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답은 자명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서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몇년전인데, 힘차게 달리던 열차가 도중 어디선가 철로를 벗어나고 만것이었다.

“40대를 탈없이 넘기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하는 말을 주위에서 심심찮게 듣는다. 공자는 “이때가 되니 세상의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40을 ‘불혹’이라고 했지만, 세상이 달라져서 일까, 이 시대의 40대는 흔들림도 많고 방황도 많다. 성실하게 잘 사는 것같던 사람이 마약이나 도박에 빠져 삶의 기반을 제손으로 허물고, 별 문제 없어보이던 부부사이에 ‘여자문제’가 끼여들어 가정이 흔들리는 일들이 40대, 특히 남성들에게서 많이 일어난다. 여성쪽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가사와 자녀양육에 몸이 묶이고 아이들과의 끈끈한 관계가 정서적 닻이 되어서 남자들만큼 심하게 중년의 열병을 앓지는 않는 것 같다.


순조롭게 살던 사람들이 왜 40대에 사고를 저지르는 것일까. 휴스턴에서 아내와 친지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한 박기영씨도 20대에 이민온후 하루 10여시간씩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도박에 빠지고 사업이 기울고 의처증이 심해지면서 비참한 종말을 맞았는데 그의 궤도이탈 역시 40대후반쯤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생의 한중간에서 왜 갑자기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 - 한 정신과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그는 세상에 ‘갑자기’란 없다고 했다.

“인생이란 벽돌담 쌓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장 한장 반듯하게 쌓아야 튼튼하지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 잘못 놓은 벽돌을 바로잡지 않고 그냥 쌓아가면 담이 높아질수록 불안정해서 흔들흔들하다 무너지게 됩니다”

살면서 풀지못한 문제나 감정들을 그냥 덮어두면 그것들이 의식 깊은 곳에 묻혀있다가 틈이 생길 때 기어이 밖으로 분출되고 만다는 것이다.
30대가 나라는 사람이나 내 인생에 대한 윤곽이 잡히는 시기라면 40대는 내 인생의 용량이 확인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산으로 본다면 내가 히말라야를 정복할지 동네 뒷동산으로 만족하고 하산해야할지 드러나는 시기가 40대이다. 젊어서 가졌던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며 허탈해지는 시기이다. “옛날에는 꿈도 컸는데 겨우 이 모양인가”“한참 오고 보니 막다른 길이야”“줄을 잘 선줄 알았는데 도중에 줄은 없어지고 나혼자 남았어”등은 40대의 단골푸념이다.

아울러 이 즈음이면 부모세대가 세상을 뜨기 시작하고 요절하는 동년배가 생기면서 “시간이 많지 않다”는 초조감이 더해진다. 몸은 갱년기 증상을 보이고, 배우자나 자녀들로부터도 존경받지 못하는 것같고…인생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는 것이 40대의 일반적 현상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최승자,‘삼십세’중에서>고 했지만 지나보면 그런 절박함은 40대에 더 맞는다. 시인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면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중에서>이 40대의 삶이다. 시와는 거리가 먼 30,40대 남성들 때문에 이 시집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40대는 인생의 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봉우리를 더 오를 것인가 하산준비를 할것인가는 각자의 결정이다. 우선은 내가 도달한 산이 어떤 곳인지, 이 산정에 어떤 사람들과 와있는지 인생 전반을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나서 솜사탕 같기만 했던 젊은 시절의 꿈을 현실에 접목시켜 재조정한다면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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