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범생 자녀 다시 보자

2001-01-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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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만철, 정신과 의사)

얼마 전 그라나다 힐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중국계 학생이 자신이 자살하는 장면을 비디오 테입에 담아 충격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 학생은 평소 말썽을 부린 일도 없고 공부 잘 하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이 학생이 죽자 한인 여자 친구도 자기도 따라 죽겠다고 소동을 벌여 정신상담을 한 적이 있다. 이 학생 또한 문제아와는 거리가 먼 여고생이었다.

많은 한인 부모들이 ‘우리 애는 학교에서 공부도 잘 하고 얌전하니 아무 일 없겠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바깥에 나가 좀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은 정신상태를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본인이나 부모 모두 기대치가 낮고 평소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지는 일도 드물다.

진짜 문제는 매일 ‘공부 잘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으며 하루 하루를 긴장 속에 지내는 아이들이다. 이중 상당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병들어가고 있다. 초기 이상 증세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중 흔한 것 중 하나가 갑자기 음식을 많이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혼자서 피자를 여러 판씩 시켜 다 먹어 치운다. 그러다가는 또 갑자기 어느 날 일체 음식을 먹지 않는다. 옆에서 보기에는 정상인데도 본인은 자꾸 자기가 뚱뚱하다고 생각하며 다이어트를 고집한다. 여학생 가운데 이런 증세가 잦다. 대부분은 약물등을 통해 치료가 되지만 심한 경우 끝내 음식 먹기를 거부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어린애들이 무슨 정신병’ 하며 청소년기의 정신 이상을 등한시한다. 그러나 미국 정신병원을 찾는 환자의 50%는 청소년들이다. 한인의 경우는 아예 어렸을 때 와 미국화가 된 사람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와 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있는 사람은 좀 덜 한 편이지만 10대의 어중간한 나이에 미국에 온 사람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정신이 이상해지기 쉽다.

정신건강을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접촉이다. 피부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때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나와 서로가 서로의 활력을 재충전해주는 것이다. 요즘처럼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해 하루 종일 혼자 방에 처박혀 있는 청소년이 많은 것도 정신건강 면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이다.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이 혼자서 우울한 마음만 썩히고 있으면 정신이 병들어 휴스턴에서 일어난 것 같은 대형 참극을 불러 올 수도 있다. 한인사회에 정신 질환자가 많은 것도 리커나 마켓등 스몰 비즈니스를 하며 오랜 시간 혼자 고립돼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민족과 함께 지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응석을 받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직 자아 정립이 안된 10대는 말할 나위 없고 다 큰 성인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식이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다는 것만 가지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과연 아이의 행동에 비정상적인 부분이 없나 유심히 살펴 빨리 도움을 구하는 것이 비극을 막는 지름길이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고 가까운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임을 새해 벽두에 새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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