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16일자 한국일보 오피니언란에서 기자수첩‘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읽고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나는 뉴욕에서 20여년 살다가 얼마전 캘리포니아로 이사온 사람이다.
뉴욕에 살 때였다. 네일가게를 하던 어떤 분이 “너무 사업이 안되어 아무래도 문을 닫아야 할까 보다”면서 근심에 잠겨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며칠 후, 그 가게에 가보았다. 정말 가게는 썰렁했는데 그 주인 말인즉 주위에 경쟁적인 가게가 자꾸 들어서서 자신의 가게가 밀려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남편도 없이 혼자 사는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그런 마음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마침 손님이 들어왔다. 그 손님은 그 가게에 처음 왔는지 어디에 앉아야 하는가 하고 쭈삣거리며 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하며 턱으로 저쪽이라는 시늉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 손님을 아주 멸시하는듯한 태도요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손님은 흑인이었다.
나는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 서비스를 받는 그녀가 고마워 괜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손님이 돌아간 후 “아니, 손님에게 그렇게 쌀쌀하게 하면 어떻게 해요?” 내가 주인에게 따졌더니 그녀는 “난 그렇게 아양떨고 아첨하는 짓은 하지 못해요”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하, 왜 가게가 안되는지 알겠구나. 나는 화가 나서 “그러면 왜 서비스업을 하시는거죠?”라고 쏘아부쳤다. 결국 그 가게는 문을 닫고 그후 그분이 여러 해를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귀족에게는 귀족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의무가 있듯이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에 온 후 X-레이를 찍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이 되는 코스타메사의 모 의사한테 가서 진찰을 받고 사인을 받은 후 그가 지정해준 미국 방사선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었다. 그곳의 테크니션은 이틀쯤 후면 의사한테 결과가 보내질 거라고 말했다. 결과가 가면 연락을 주겠지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2주일이 지난 뒤 병원 리셉셔니스트에게 전화해서 물어 보았더니 결과가 아직 안왔다고 했다. 한주일 더 지난 뒤 다시 물어보았더니 아직도 안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방사선 병원에 직접 전화해 물었더니 “벌써 보낸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럼 그 결과를 지금 곧 담당의사한테 팩스로 보내주시오” 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다시 병원 리셉셔니스트에게 전화하여 “지금 곧 결과가 그쪽으로 갈터이니 그 결과를 내게 팩스로 좀 보내 달라”고 했다. 전화 저쪽편에서 냉랭한 목소리로 “그럴께요” 한다.
어렵사리 그 결과를 받은 후 병원에서 결과가 이러저러하니 언제 오라든가 안심하라든가 하는 연락이 있겠지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난후 다시 전화해서 나의 X-레이 결과가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리셉셔니스트가 거의 히스테리칼한 목소리로 “아니, 앉아서 받아만 먹겠다는 거예요? 여기에 오라구요. 와서 페이스 대 페이스로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할 게 아니예요? 병원절차에 대해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하고 좔좔 쏟아 붓는다. 한참을 듣다가 나는 “네, 잘 알았습니다” 하고 끊고 말았다. 아니 언제 오라는 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의사가 X-레이를 찍으라 했으면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해 환자에게 전화를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미국에 한 두 해 살았던 나도 아니고, 미국 종합병원에서도 X-레이를 찍은 후에는 환자의 염려를 고려하여 반드시 전화를 해서 오라든가 안심하라든가 하는 봉사는 한다. 그런 일이 병원의 리셉셔니스트들이 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뉴욕이기 때문이고 여기 한국 병원의 리셉셔니스트들의 행동은 특별히 캘리포니아니까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지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아무래도 너무 한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정의사를 통해야만 다른 전문의를 찾아갈수 있는 제도적 약점을 이용해서 환자에게 이토록 무관심하고 무책임해도 되는 것인가? 그들이 고맙게 하면 다음에는 환자들이 오라지 말라고 해도 더 갈터이고 그러면 병원도 커질수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