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보울딩 교수는 ‘20세기의 의미-대전환’ 이라는 문명 비평적인 저서에서 인류역사의 발전단계를 ①문명전 단계 ②문명단계 ③문명후 단계로 나눴는데, 21세기를 맞는 현재 문명사회는 끝나고, 새로 문명후 사회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지론을 빌린다면 21세기는 바로 문명후 단계로 접어든 셈이다. 그러나 막상 문명후 단계란 어떤 단계를 말하는가 물으면 딱히 이런 것이라고 대답하기 쉽지 않다. 어느 학자는 그 사회를 산업사회 다음의 사회(Post-Industrial Society)라고 부르기도 하고, 전자·기술사회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식·정보사회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제학자는 초자본주의 사회(Hyper-Capitalism)라고 이름 짓기도 한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앞에 두고 네가지 함정 즉, ①전쟁 ②가난한 나라들의 경제발전 ③인구증가 ④자연고갈과 고도성장 문제 등을 어떻게 인류가 공동으로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문명 후 사회가 희망의 사회인지 절망의 사회인지가 결정된다고 하겠다. 나는 이 네가지 함정에다 하나 더 에이즈 문제를 추가하고자 한다. 20세기말부터 출현한 에이즈는 섹스의 자유,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잃은 자본시장의 지구화와 함께, 전세계로 무섭게 퍼져가고 있으며, 2020년경에는 에이즈 환자가 약 4,0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에이즈 문제는 마약, 섹스, 범죄, 동성연애 등 자본주의 문명의 어두운 면과 함께 근면, 금욕, 일부일처 제도를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티즘에 반대하는 가족단위의 공동체의 해체와 신의 모습대로 지어진 인간의 파멸을 부르고 있다.
전세계로 퍼지고 있는 에이즈는 섹스의 자유와, 그 결과 일년에 1,500만명이 각종 성병에 걸린다는(미국) 사실과 함께 쾌락주의가 기를 쓰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가난한 아프리카 대륙에선 아프리카 대륙 자체를 파멸케 하는 대함정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인류역사상 세 번의 대질병이 유행했는데 첫째는 1330년대 중국에서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 퍼진 흑사병이고, 둘째는 1918~1919 동안 유행했던 인플루엔자이고, 셋째는 에이즈 질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첫 에이즈 환자가 발생한 후 지금까지 1,200만명이 죽었으며 하루에 6~7,000명이 죽어가고, 2010년까지 2~300만이 더 죽어갈 것이며, 이 질병 때문에 아프리카의 평균수명은 20대로 낮아질 전망이다(지금 시에라리온 35세, 짐바브웨 30세). 거기다 1998년 현재 에이즈 때문에 생긴 고아는 약 7~800만명, 2010년까지는 그 수가 4,000만 명으로 늘어갈 것이라고 한다. 에이즈로 죽어 가는 사람의 42%는 흑인이고 28%는 라티노다. 에이즈는 자유화와 자본주의 시장화의 물결을 타고 전에 공산국가였던 러시아, 동구권, 중국으로 확산되고 동남아까지 퍼져가고 있다. 물론 한국도 무방비권에 들어있는 셈이다.
이 통계가 말해 주고 있듯이 아프리카 에이즈 문제에 대해선 전세계가 공동대책을 취하지 않으면 아프리카의 장래는 절망과 파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프리카만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류전체, 그중에서도 특히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믿고 있는 서방 강대국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즈 예방기금의 95%는 선진 산업국가에서 쓰여지고 있으며, 나머지 5%가 가난한 나라에서 쓰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영, 불을 비롯한 유럽의 가혹한 식민지 착취로 깊은 상처를 입은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들은 외국 빚에 짓눌려서 에이즈 예방기금은 전무한 상태이다. 지금 사하라 사막 아래의 아프리카(Sub-Sahara-Africa)는 한해에 310억 달러의 빚을 갚아야 할 형편에 있다. 아프리카가 당하고 있는 이 절망적인 가난과 이 절망적인 에이즈 질병의 이중 고통을 외면하고선 누구도 세계평화와 번영을 말할 수 없다.
나는 문득 아인슈타인이 주장했던 세계정부를 생각한다. 몇몇 돈 많고 힘센 강대국이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멋대로 움직이는 UN은 이 세계적인 재난을 해결할 수 없다. 고도성장에 혈안이 되고 광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서방 공동국가들이 국가 이기주의와 팽창주의를 버린 뒤, 인류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세계정부 같은 실제적인 세계공동체 기구가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를 파멸케 하는 핵전쟁 방지문제나 오존층 파괴 방지문제, 그리고 에이즈 같은 인류적인 관심사에 대해서만은 세계가 공동으로 대처하고, 적극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인류는 대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