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잠시 짬을 내 이웃과 함께 팜 스프링스로 온천욕을 다녀왔다. 나와 아이 모두 감기로 콜록거리는데다 아내가 발을 심하게 접지른 탓에 "조금 멀리 가보자"던 당초의 계획을 취소하고 이웃의 제안에 따라 새로 잡은 행선지였다.
모처럼의 온천욕은 즐거웠다. 거리가 가까워 운전부담이 없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따뜻한 물에서 마음껏 물장난을 칠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온천여행을 먼저 제안했던 이웃 아주머니는 직장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한 남편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듯 했다. 온천으로 출발하기 직전 회사의 긴급호출을 받은 아저씨는 "나 때문에 애들까지 못가서야 말이 되느냐"며 내켜하지 않는 아주머니의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그런 남편을 "1년내내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안쓰러워했다.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나니 불현듯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스가 떠올랐다.
당대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아버지인 시지프스는 염라대왕 플루토를 농락할 정도로 술수에 능한 인물이었다. 임종에 앞서 그는 아내에게 "내가 죽거들랑 시신을 길거리에 내다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저승세계로 내려온 시지프스는 플루토에게 "아내가 정말 내 시신을 거리에 한복판에 버렸다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아내의 사랑을 확인할수 있도록 딱 삼일간 생명을 되돌려달라"고 간청한다. 호기심이 동한 플루토는 그의 청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영계로 되돌아갈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화가 치민 플루토는 저승사자를 급파했지만 그마저 시지프스의 계교에 넘어가 쇠사슬로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플루토는 자존심을 꺾고 제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제우스는 머큐리를 보내 시지프스를 생포한다.
다시 지하세계로 끌려온 시지프스에게 신들은 집채만한 바위를 가파른 산의 꼭대기까지 운반하라는 벌을 내린다.
그는 매일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바위를 산정상으로 밀어 올리지만 산꼭대기에 도달한 바위는 어김없이 까마득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떨어질게 뻔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힘겹게 운반하는 작업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하는 것, 그게 바로 시지프스에게 신들이 내린 가혹한 형벌이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시론’이라는 부제를 달아 내놓은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간에게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지프스의 비극은 자신이 한 일이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데 있다고 말한다. 매번 바위를 밀어올릴 때마다 희망이 그를 뒷받침 해준다면 비극이 끼여들 틈은 없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은 분명 시지프스를 닮았다. "1년 내내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웃집 아저씨도 허구헌날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를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일에 치여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영락없는 시지프스의 판박이다.
그 말은 삶의 수단과 목적이 전도됐다는 한탄에 다름아니고, 그것이야말로 현대판 시지프스가 받은 형벌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인사회의 시지프스들은 아직도 희망의 끈을 거머쥐고 있다. 매번 바위를 굴려 올릴때마다 그들은 희망의 지원을 받는다. 설사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개인적 가치를 상실한 노동이라 해도 그 힘겨운 바위굴리기를 통해 차세대의 꿈을 가꾸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이민 1세대의 공통된 의무감과 후대의 삶은 이보다 나을 것이란 희망이 이들을 떠받쳐 주고 있다.
내 이웃들에게 생업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고된 것일수 있고, 개인적 성취와는 거리가 먼 일일수도 있지만 희망없는 헛수고의 노동은 아닐터이다.
어느 비오는 날, 굴러 떨어진 바윗돌을 찾으러 어깨를 늘어뜨린채 산을 내려가는 이웃집 아저씨를 만나면 잠시 그를 불러 세워 한담이라도 나누고 싶다. 카뮈의 지적대로 이 풍진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은 같은 처지의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한 유대감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