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모의 끝

2000-12-30 (토)
크게 작게

▶ 서병연<베데스다 신학대학교>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부비며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엊그제께 Y2K가 어쩌고 저쩌니 비상식량을 준비해야 하고 정전이 생겨 온통 세상이 난리가 날 것처럼 호들갑스러웠는데 2000년의 달력이 덩그라니 한장뿐이다.

가가호호 송년의 뜻을 지니며 울긋불긋 네온의 아름다운 꾸밈으로 세모의 한가닥을 아쉬워 하는 것 같다. 대설이 지나고나면 눈이 많이 날리기 시작하며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삶의 고됨도 잠시 접고 내리는 눈을 만끽하며 한계절의 품안에서 생의 맛을 느끼는 고국이 그리워진다. 미국에 온지 오래되지 안았는데도 눈이 그리워 금년 정월엔 세번이나 아주사 산을 찾아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도는 차바퀴의 무감각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흰눈 쌓인 머-언 산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움이란 세월이 쌓여갈수록 골깊은 산이련가. 나의 마음이 심산하다. 눈앞에 아롱거리는 고국 산야는 빨리 오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고 핀잔하며 날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지만 그곳이나 이곳이나 삶의 테두리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아니련가. 모든 삶의 등짐을 잠시 내려 놓고 즐겼던 산행은 어제의 고통과 번민을 내일의 소망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성해내는 원동력이었다.


연말이 되면 부자간에 때론 산악회 회원간에 의기투합하여 눈 쌓인 지리산 등반을 해왔다.무릎까지 올라온 눈길을 헤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 오르며 천근만근된 두다리를 이끌고 정상인 천왕봉(1,915m)에 올라 새해 첫날에 떠오른 찬란한 태양을 응시하며 한해의 계획과 바램을 맘속 깊이 소리쳐 외쳤다.

참고 기다림이란 꿈을 이뤄주는 믿음일까. 침잠해 버릴 것 같은 숨죽임에 응답이라도 한듯 붉그레한 미소를 머금고 살포시 내민 새해의 태양은 산악인들의 함성을 들으며 밝고 커다란 모습으로 어둠을 가시게 한다. 맨산을 오르는 것도 힘이 드는데 눈쌓인 산은 더더욱 힘이 들어도 새해 첫날의 동틈을 보기 위해 견디며 올랐던 보람이 한 순간에 이뤄지는 뿌듯함을 가슴에 묻고 얘기꽃을 피우며 하산하는 기쁨도 만만치 않다.

육체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성숙도 함께 해야 기형적 형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의 쫓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가끔 마음의 쉼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성경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한수의 시를 읊어보고 다정한 벗들과 수다도 좋을성 싶다. 힘든 세모의 멍에를 벗어놓고 홀가분하게 사색의 심원 속으로 들어가 평강을 찾는 시간들이 많이 주어지길 바란다. 안되는 것 보기 싫었던 것 못살겠다는 섧은 아픔도 묵은 해와 함께 버려버리자. 잊어버리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