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대한 카지노

2000-12-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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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세이

▶ 안상호 <경제부장>

마약은 한번 들어서면 끊기 어렵다. 마약에서 돌이킨 지 몇 년이 지나 이제는 마약퇴치 캠페인을 펴고 있는 사람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솔직히 아직 자신 없다”고 할 정도다.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한 것이 도박이다. 통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중독의 강도는 섹스홀릭, 마약, 도박의 순이라고 한다. 가석방된 어린이 성추행범이 마을에 들어오면 주민들이 난리를 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박은 ‘관뚜껑 덮기 전에는 끊기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도박의 가장 큰 문제는 맛들이면 노동이 무의미해진다는 데 있다. 땡볕 아래 종일 땀흘려 일해야 100~200달러 버는 사람이 앉은자리에서 몇 백달러 따고 나면 근로의 동기와 에너지는 깡그리 사라지게 된다.


도박이라고 매일 잃는 게 아니다. 하루 따고, 사흘 잃고 하는 사이, 집 팔고, 비즈니스 팔고,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가정을 날리게 된다.

건전한 투자가들에게는 대단히 실례되는 이야기지만 최근의 주식시장을 보면 도박판이 생각난다. 금리인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주식시장이 조금 생기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지난 3월 이후 증시를 통해 날아간 미국의 국부는 4조달러에 이른다. 남가주 한인사회에서 사라진 커뮤니티의 부가 최소 수천만달러라는데 거의 이견이 없는 것 같다.

90년대 초 부동산 값이 폭락하면서 한인 커뮤니티는 엄청난 부의 유출을 경험했다. 80년대 부동산을 통해 쌓았던 커뮤니티의 여유자금은 이때 날아갔다. 롤스로이스가 차고에서 사라지고, 100만달러 맨션은 은행에 차압됐다. 윌셔가 빌딩과 목 좋은 대형 상가, 아델란토의 수백에이커 땅들이 차례로 넘어가면서‘타운에 부자가 없다’는 말이 나왔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라지만 10년 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부동산이 주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자고 나면 뛰던 하이텍주는 노다지가 아니었다. 부동산으로 돈 못 벌면 바보라도 된 것 같은 괜한 열등감을 이웃에게 안겨주던 투자전문가들이 90년대에 가장 처참하게 당했듯 2000년에는 주식 전문가연 하던 사람들일수록 껍데기만 남았다. 쉬쉬하지만 속에서 신트림이 올라오고, 잠 못 이루는 ‘그대’가 한 둘이 아닌 것도 10년만에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부동산이나 나스닥 폭락이 한인 커뮤니티에만 닥친 일이 아닌데 일이 터지면 유독 한인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는 것은 초단기, 초공격적 투자에 한탕주의, 도박판 심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텍주 투자로 불과 한 두달 새 50만달러를 벌고 나니‘아하 돈은 이렇게 버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이 왔다는 한 샌드위치샵 주인이 앞으로 어떤 일로 돈을 벌려고 결심했는지는 뻔하다.

2배로 먹으려다 2배로 당했던 10년전 일은 이번에도 교훈이 되지 못했다. 가격하락에 내성이 전혀 없었던 부동산 투자방식은 이번에도 재현됐다. 주식담보 융자인 마진으로 투자를 하다 깡통만 남은 한인 투자가들은 말 그대로 부지기수다.

87년 블랙먼데이 때도 13개월 후에는 주가가 모두 회복됐다고 하니 온돈 주고 산 주식은 갖고 있으면 언젠가 오르게 되겠지만 주가의 3분의1 정도만 떨어지면 융자금 회수가 들어오는 마진콜 때문에 마진 투자가들은 사정이 판이하다.

3년 이상 지니고 있지 않으려면 단 5분도 주식을 갖지 말라는 투자 격언이야 말 그대로 격언일 뿐이라고 쳐도 하루 수십번 사고 파는 데이 트레이딩은 정상 투자방식이라고 하기 어렵다. 마진 투자, 데이 트레이딩이 판을 친 한인들의 투자행태를 지켜보면서 “카지노 밖에 또 하나의 거대한 카지노가 형성된 것 같았다”는 한 투자 관전기는 나름대로 일리 있는 꼬집음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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