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째 지켜봐 오던 파킹장의 들풀이 지난 여름 관리자의 정화작업에서 모두 뜯겨 나간 뒤 몇 포기의 잡풀만이 다시 자라나고 있다. 가을이 가고 겨울로 접어드는 쌀쌀한 날씨에 그들은 어떻게 지내나 다시 가 보았더니 모처럼 내려 쬐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한가롭게 가느다란 잎들을 팔락인다.
‘저것도 생명이려니’ 생각하니 과연 인간의 생명과 이름 없이 피었다 지는 들풀의 생명과 무슨 차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번뜩 스치며 지나간다. 인간이 한 여름 피었다 겨울이 되면 저버리는 들풀을 바라보고 그들의 짧은 생을 안타깝게 생각할진대, 인간생명 역시 무궁한 세월 속에 얼마나 짧은 생을 살다 가느냐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또 때린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이 질문만큼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다 죽어가면서 인간이, 삶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하다 수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무소유’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이 뉴욕을 다녀가며 ‘금강경’을 예로 들며 남긴 말이 아직도 생생히 귓전을 맴돈다. “인간이란 열린 마음이 본심이요, 닫힌 마음이 되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어진다. 그러니 빨리 마음을 돌려 열린 본심으로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선뜻 내어주는 인간이 돼 나눔의 삶을 살아가라” 그 때 스님의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90년대 초, 전기도 없는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홀로 암자를 짓고 8년째 수행생활을 하고 있다는 법정 스님은 조계종 사태로 스님들이 싸움을 일삼으며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잡지, 신문, 방송 등에 일체 붓을 끊었다고 한다. “집안(종단) 일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세상을 향해 무슨 글을 쓰겠느냐”가 이유란다. “남은 또 하나의 나”라고 말하며 “남에게 봉사하는 것이 인간 최대의 미덕”이라고 법문한 스님은 1999년 12월 ‘오두막 편지’란 산문집을 저술했다. 그는 책 속에서 “새벽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머리맡에 사근사근 다가서는 저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 개울물 소리에 실려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살아있는 우주의 맥박을 느낄 수 있다”며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에서 나는 우주의 호흡이 내 자신의 숨결과 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고 술회한다.
법정 스님이 느낀 대로 우주의 호흡이 인간의 숨결과 서로 이어지고 있음은 우주가 살아있고 그 우주 속에 인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개울물 소리, 빗소리 등 자연의 소리들도 이 안에 포함된다. 또 파킹장 들풀의 팔락이는 잎새 소리까지도 우주의 삶 안에 들어간다. 아무리 하찮은 그들의 생명과 삶이라 해도 한번 태어나 생명을 유지하다, 다시 우주 안으로 사라지는 건 들풀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기에 그렇다. 무소유로 왔다 무소유로 가는 게 인간이자 인간의 삶이 아닌지.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들은 서로 소송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있을까.
파킹장 구석에 피어나 작은 햇볕에 만족하는 이름 없는 그 들풀이 너무 자유스러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