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울에서 본 서울

2000-12-06 (수)
크게 작게

▶ 수요칼럼

▶ 이 철 (주필)

오늘 아침 서울에서 방송된 TV 뉴스 중에 매우 쇼킹한 것이 있었다.

대구 어느 아파트촌에서 집 페이먼트를 못 낸 사람들이 야반도주하는 케이스가 부쩍 늘고 있다는 뉴스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매달 아파트 관리비가 1만5,000원인데 이것도 못내는 가구가 전체 아파트 주민의 40%나 되며 전기, 수도세를 못내 전기가 끊기고 수돗물이 안 나오는 경우가 하나둘이 아니라면서 그 살벌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파트 관리비가 한달에 1만5,000원이라면 달러로 12달러 꼴이다. 이 정도도 못 낼 형편의 사람들이라면 끼니를 제대로 잇는지도 의심해야 할 것이다. 서민생활이 바닥에까지 내려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2의 IMF는 시작될 것인가"라는 신문 타이틀이 눈에 뜨이는데 ‘시작될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제2의 IMF가 와 있다.

전국에서 문닫는 공장이 늘어나고, 대학생들은 졸업해도 취직을 못해 우울한 표정이고, 직장마다 감원 바람이 몰아치고, 거리에서 연일 노동자들이 붉은 띠를 두르고 데모하고 있고, 농민들은 고속도로에서 농성하며 길가는 차량에 돌을 던지고 있다. 어디를 돌아봐도 마음 편한 데가 없고 썰렁한 분위기다.

3년 전에 있었던 IMF는 외환위기였다. 그 때는 달러문제만 극복되면 난국이 수습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번 IMF는 그게 아니다 ‘외환위기’가 아니라 ‘경제위기’다. 팔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내출혈에 심장이 나쁘고 위경련까지 겹친 위기일발의 상황이다. 만약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중대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인기가 10%선으로 떨어지더라도 구조조정 개혁을 계속 밀고 나가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말하는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한강을 헤엄쳐 건너오다 중간에서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식이다. 돌아가는 거리면 힘들더라도 강을 건너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눈 덮인 산 속의 외딴 집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집이 낡아 폐허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의 차이다.

지금 한국 경제를 미국에서 보는 것과 서울에 직접 와서 보는 것과의 차이는 위기의 느낌이다. 미국서는 몰랐는데 서울에 와보니 "한국 경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상황 설정에 동의가 간다. 잘못하면 DJ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DJ 정부를 전혀 믿지 않는다. 민심이 정권에서 완전히 이탈해 있다. 민심은 천심인데 정권이 민심을 잃고서야 무슨 일을 할 수가 없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데도 안 믿는다면 설득력이 없어져 리더가 위기를 헤쳐 나아가는데 에너지 공급원이 없어지게 된다.

놀라운 것은 여당인 민주당 최고위원들조차 민심 이탈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엊그제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여당 최고위원들과의 연석회의 석상에서 여당간부가 "민심은 정부에 등을 돌리고 민주당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라고 말할 정도다. TV 카메라가 돌아가는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그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전 같으면 "보수세력의 반발이며 그렇게 심각할 정도의 위기는 아니다"라고 표현되고는 했었는데 이번에는 여당 최고위원의 입으로 "민심이 등을 돌려"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현정부의 최고 과제는 경제 회복에 앞서 민심 바로잡기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약간 혼돈 되는 부분도 있으나 정부의 민심 상실이 심각한 정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봄까지만 해도 DJ 정권을 우호적인 단어로 표현하던 사람들도 요즘은 DJ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대통령이 밑에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너무 독주하고 있으며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분위기에서는 DJ가 노벨상 수상식장에 참석하는 것이 어색해 보일 정도다.

위기인데도 위기로 생각 않고 있는 것이 최대의 위기다. 김대중 대통령이 얼마 전까지는 그런 자세로 임해 오다 요즘 "이게 아니로구나"하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각계 인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 DJ가 조만간 중대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12월의 서울’ 분위기다. 정말 ‘블루 크리스마스’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