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죽음의 차이

2000-12-0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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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춘<뉴저지 페어필드>

건강한 사람에겐 죽음이란 항상 자기와는 먼 거리에 있는 생각하기도 싫은 단어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 만일에 이 세상 자기 생의 마지막 그 날을 인간들이 모두 알고 있다면 철학교과서는 다시 써져야 할 것이고 삶의 가치관이 지금하고는 판이하여 그 혼돈의 세계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상상을 불허한다.

죽음이란 항상 나와는 상관없는 행사요,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일이다. 그러다가 주위의 사람이 갑자기 중병이 들거나 가까운 친지나 가족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고뇌에 찬 철학을 배운다.

고희 잔치를 3년 전에 치르신 큰 누님이 한달 전에 암 수술을 받고서야 생존의 시한을 가늠하면서 사후의 유택을 준비하여야 함을 느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줄지어 선 하얀 십자가, 알링턴 국립묘지의 꺼지지 않는 케네디대통령의 횃불 묘지, 또 뉴욕 근교의 일반 서민들의 공동 묘지. 생각하여 보니 남들의 산소에 관광차, 참배차, 또 조문으로 들러보았던 묘지가 수없이 생각난다.


이곳에 형제 자매 또 같이 늙어가는 장조카까지 있으니 가족묘지를 구입하면 죽어서도 외롭지 않겠다고 생각되어 지난달에 묘지 샤핑을 몇 군데 하고 적당한 자리를 구입하였다. 계약금을 치르고 이제는 내 땅이다 하고 다시 한번 서 보니 생과 사의 차이는 지금 이 자리에 두 발로 서 있는 것과 발밑 잔디 아래 누워있는 것의 차이라는 것 뿐이다.

입심 좋은 조카가 엄숙한 분위기를 바꿔준다. “작은아버지 우리 모두 콘도 한 채씩 샀네요” “그래, 네말이 맞다. 이 정도면 호화 콘도미엄이다”
어떤 이는 죽으면 굳이 고국으로 가서 묻히겠다고 하지만 그곳은 일년이면 서울시의 두배 세배가 묘지로 잠식된다는데 정들면 고향이라고 반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왔는데 손바닥만한 반도 땅에 묻히는 것보다 공기 좋고 땅 넓은 이곳 대륙땅에 잠자는 게 고국을 위한 마지막 애국충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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