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언니의 편지

2000-12-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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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진<회사원>

내 바로 위의 언니는 나와 일곱살 차이다. 원래 언니가 막내인 줄 알았다가 6년이 지나 나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7년만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한다.
언니는 통이 크고 시원시원해서 해군사관 학교를 나와 장군이 된 남편과 살며 언제나 “여장군”소리를 들었다. 그런 언니가 40대 후반에 들며 남편을 잃었다. 서구적인 용모와 세자리수 IQ로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우습게 보며 설치던 처녀시절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해군대위였던 형부를 만난 순간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했다는 언니는 ‘그 분은 음악으로 치면 오케스트라 같은 사람’하며 곧장 열애에 빠져 결혼하더니 겨우 20년 남짓 살고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 보냈다.

생전에 성난 얼굴이나 큰소리 한번 집안에서 보인 적이 없는 형부는 ‘남자는 모름지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만 화가 나거든’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과 영이별을 한 언니는 그 후로도 씩씩하게 웃음을 잃지 않고 잘도 살아서 주위 사람들이나 심지어 딸들까지도 우리하고는 스케일이 다르니까하고 감탄하다가 차츰 언니에 대해 신경도 안 쓰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전 오랜만에 언니 집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우연히 보게 된 묵직한 노트, 그것은 보낼 수도 없고 답장을 바랄 수도 없는 오랜 세월 그냥 쓰고 있는 그녀의 편지였다.

“여보! 오늘 밤도 당신께 답장 없는 편지를 씁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사랑은 끝났지만…”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훔쳐보지도 못하고 덮고 말았다.


그렇게 호탕하고 대범해서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고 사소한 고민으로 우리가 괴로워하면 언제나 명쾌하게 답을 내주는 그녀의 밝은 웃음 뒤에, 보이지 않는 눈물을 목 뒤로 삼키며 매일 밤 수신인 없는 편지를 썼던 잃어버린 사랑을 슬퍼하는 작은 여인이 있었을 줄이야. 철따라 피는 꽃도 혼자서 뜨는 달도 그녀에게는 눈물이었을 줄이야.

“남의 열병이 내 감기만도 못하다”는 속된 옛말이 바로 나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늦게야 깨닫고 미안하고도 쓰린 마음에 괴로웠다.
유난히 달이 크고 밝은 오늘 밤, 지금도 회답 없는 편지를 쓰고 있을 언니의 창가에 비추일 저 달을 보며 맑고 시원하고 그늘 없는 언니의 얼굴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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