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들이 떼를 지어 쳐들어왔다. 대통령, 공화국으로서 미국의 운명등 중차대한 일들이 모두 자신들에게 달려있는 양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며칠만에 테레사 르포어는 잇단 소송세례로 곤욕을 치르게됐다. 자그만치 열두차례나 소송을 당했다. 문제의 나비형 투표용지 고안자이기 때문. 민주당원인 그녀가 나비형 투표용지를 고안한 것은 많은 노년층 민주당 유권자들이 투표용지에 쓰여진 글씨를 잘 알아 보게 하기 위한 당리적 차원에서 였는데도 말이다" "고어의 당선을 돕기위해 수개표 재검표를 독려했던 민주당 선관위원들이 이제는 모두 ‘민주당의 적’이 됐다. ‘카운티 선관위가 불법적으로 수천표를 무효표로 방치했다’는 내용의 소송을 민주당이 냈기 때문이다" 언뜻 이해가 안된다. 혼란스럽다. 그러나 엄연히 플로리다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해프닝들이다.
’지난 밀레니엄동안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전은 법치주의의 확산이다.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문명의 기초다. 법치주의는 그러므로 문명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저명한 정치학자의 지적이다. 법치주의의 전통이 가장 굳건한 나라는 미국이다. 권력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현명한 건국시조들을 둔 덕분이다. 그래서인지 독립된 사법부는 미국에서는 상식이 된지 오래다. 요즘들어서는 그러나 법치주의 유산에 대해 미국민들은 오히려 냉소적이다. 지난 40여년간 미국사회를 지배해온 소송만능주의의 여파다.
미국의 사법부는 60년대 민권투쟁시대이후 사법부의 역할은 물론이고 준 입법부의 역할도 겸해왔다. 단순한 법해석의 차원을 넘어 법제정의 동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판례를 남김으로써 새로운 법을 만드는, 일종의 ‘행동주의적 사법부’(Judicial Activism) 역할을 해온 것이다. 행동주의 사법부는 사회정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업적을 남긴 게 사실이다. 지난 60년대, 70년대에 나온 민권신장과 관련된 각종 판례는 물론이고 뒤이어 나온 근로자, 환경, 소비자 또 심지어 형사 피의자의 인권까지 보호하는 각종 판례는 행동주의 사법부가 이룩한 혁혁한 업적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소송만능주의 만연사태가 그 병폐다. "옆집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내 뒷마당으로 떨어지면 옛날에는 처리 방법이 간단했다. 먹든지 버리든지 하면 그만이었다. 요즘에는 변호사를 불러야 한다" 행동주의적 사법관행과 관련해 툭하면 소송을 하는 풍조와 빗대 나온 말이다.
미국민의 사법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최근들어 더 확산돼왔다. 인종문제를 카드로 사용해 살인자의 누명에서 교묘히 탈출한 O.J.심슨재판식의 변론, 또 사소한 문제를 확대해 거액의 배상을 뜯어내는 각종 집단 민사소송등이 불신을 더욱 조장한 요소들. 그러니 ‘법의 관리자’인 변호사를 비하하는 각종 조크가 유행을 타고 심지어 변호사 망국론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국의 사법시스템이 또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4주째 끌어온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의 대권싸움이 뒤죽박죽의 법정싸움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대법원이 내린 결정을 연방대법원이 심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민주당이 같은 민주당원을 피고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렇듯 피아가 혼동되고 또 소송건도 많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가닥을 정리하면 얽히고 설킨듯한 정치권의 법정싸움은 하나로 귀결된다. 행동주의적 사법관행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파간의 대결이다. 주입법부와 행정부를 무시하고 주사법부가 플로리다주 선거법을 새로 해석, 자의로 개표 마감시한을 정한 게 바로 행동주의적 사법관행이라는 게 부시측의 지적이다.
이와 함께 ‘제왕적 사법부’(Imperial Judiciary)에 대한 공격도 만만치 않다. ‘제왕적’이란 표현은 닉슨대통령 시절 의회의 견제없이 대통령권한이 남용되자 나온 것인데 사법부의 권한이 비대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이같은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의회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여차직하면 43대 대통령을 의회가 선출하겠다는 움직임이다. 말하자면 변호사와 판사들이 대통령을 결정하는 사태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의사다.
일단은 연방대법의 결정을 기다려 보아야 하겠지만 ‘이제는 변호사들이 떠맡은 부시와 고어의 대권싸움’은 생각밖으로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다. 헌정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는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