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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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명령시대 지났다

2000-11-3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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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삶

▶ 여주영<본보 뉴욕지사논설위원>

지난주 한 보도에 의하면 컬럼비아 대학의 조사결과 가정 폭력시 한인들은 600명중 7%만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한 반면 중국인은 59%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답변, 거의 9배나 되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인 여성들이 남성 폭력에 대해 대단히 소극적이고 은폐하려는 경향이 심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배우자로부터 폭행을 당하면서도 한인들은 대부분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길 지극히 꺼려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목숨을 잃거나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다반사다.

지난 주말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 가해 남편도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을 시도한 사건은 한인 부부 폭행의 현실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이민생활이란 사실 부부가 서로 협조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한 가정의 가장이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 그것도 모자라 법원의 접근 금지명령을 받고도 살해까지 하다니… 이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한마디로 병적인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사실 배우자 폭행문제는 어제, 오늘 일어난 얘기가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심각한 가정문제이자 사회적 문제이다. 한인의 경우 특히 폭행을 배우자로부터 당해도 상당수는 일어난 일을 거의가 남이 알까 ‘쉬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피해 당사자가 폭행을 당한 사실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생각, 기껏해야 남편이 한 대쯤 때린 것으로 가볍게 여기는 데에 있다. 한인사회에서 사실 기혼이든, 미혼이든 여성들이 남성에게서 한 대라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남성들이 얼마든지 말로도 할 수 있는 일을 걸핏하면 ‘뭐 이 딴 게 있어?’ 머리를 한 대 쿡 쥐어박거나, 뺨을 한 대 툭 치면서 무조건 여성들을 무시하고 드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바로 여성 경시풍조가 배어 있는 남성들의 잘못된 힘의 과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인가정의 문제는 거의가 남성들의 이 어처구니없는 힘의 역동, 즉 가부장제로 인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성의 명령에 여성들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이것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만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폭행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높고, 낮고, 잘나고, 못나고, 여자, 남자 등등. 죽어도 놓지 못하는 차별적 남존여비의 사상, 대대손손 내려오는 이 가부장제에 대한 미련을 남성들이 버리지 못하는 한 한인 가정문제는 아마도 근절되기 어렵지 않을까 본다. 미국은 국가의 근원을 남녀평등에 두고 있다. 인간은 평등을 원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불평등 하에서는 힘의 균형이 무너져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 관계는 마땅히 동등해야 할 일이다.

참정권만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차등 없이 투표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다. 물론 미국의 경우도 1920년이 되어서야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따금 주위에서 여성들을 만나면 흔히 ‘억울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남성에게서 부당함을 많이 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많은 여자들의 마음 속에 은연중 좋지 못한 감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자신들만 순종해야 하는가, 남녀 불문하고 서로가 같이 좋고 나쁜 것을 공유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관계 하에서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대등적 입장에서 일방적인 요구나 강요는 있을 수 없다. 남녀평등의 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관계에 놓여질 때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가장의 상습적 폭행이 빚는 가정의 참극은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인 여성의 의식 속에 남녀관계에 대한 인식부재, 폭행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자세 결여, 거기다 남성들의 못난 사고방식에 의해서 유발된다고 볼 때 이제는 좀 한인들의 의식구조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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